전쟁 속 배움의 끈…대구피란학교 선생님을 찾습니다
“처음에는 화장터 근처 언덕 큰 나무에 칠판을 걸어 놓고 공부했습니다.”안병영(76) 전 교육부총리의 6·25 전쟁 당시 체험이다. 그는 당시 서울에서 초등학교 4학년을 다니다가 대구로 피란 와 있었다. 안 전 부총리가 증언한 노천 교실은 ‘서울 피란 대구성남국민학교’의 모습이다. 전쟁 속 판자촌에 세워진 ‘대구피란학교’전쟁은 참혹하게 벌어지고 있었지만 학생들은 피란지에서 공부를 이어간 것이다. 전쟁 속에서 배움의 끈을 연결한 ‘대구피란학교’ 이야기다. 지난달 개관한 대구교육박물관은 첫 번째 기획전으로 ‘한국전쟁, 대구피란학교-전쟁 속의 아이들’을 마련했다.전시장을 들어서면 재현된 판자촌 학교가 보인다. 교실 앞에 깡통을 놓고 쪼그려 앉은 아이와 가로등 불빛 아래 신문을 돌리는 학생 조각상이 당시의 고단함을 말해 준다.6·25전쟁이 나자 대구로 피란민 40여 만이 모여들었다. 구호물자는 넉넉지 않았다. 피란 학생은 수업이 문제였다. 당시 대구는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군대가 학교 건물을 사용하면서 교육 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피란 학생을 다 수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노천 수업이 등장한 배경이다. 칠판을 걸 수 있는 나무가 있고 아이들이 앉을 공간만 확보되면 그곳이 바로 학교요 교실이 됐다.중등 과정도 있었다. 1951년 9월 ‘서울 피란 대구연합중학교’가 대구 중구 남산동 일본 육군 관사 자리에 문을 열었다. 임시 교실은 판자로 얼기설기 지어져 여름에는 푹푹 찌고 겨울에는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1952년 피란 중학생이던 마종기(79) 시인은 당시 ‘우리학교’란 시를 남겼다. ‘우리학교는 서울 피난 학교다/쓰러져 가는 하꼬방 집이다/겨울엔 창문으로 무섭고 찬 바람이 불었다/그렇다/배움에 끓는 학도들은/연상 손을 호-호 불면서 공부를 했다/앞날의 희망을 보고…(하략)’마종기는 아버지인 아동문학가 마해송을 따라 대구로 내려왔다. ‘서울 피란 대구연합중학교’는 13개 학급 학생 2425명(중학부 1383명, 고등부 1042명)으로 기록돼 있다. 학생들은 간단한 면접을 거쳤다. “너 서울 어느 학교 다녔어? 국어 선생님 이름이 뭐였지?” 이런 질문에 답을 하면 입학할 수 있었다.교사는 서울에서 교편을 잡다가 피란 온 51명이었다고 한다. 마 시인은 당시 한 선생님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키 크고 얼굴이 검던 김소영 선생님인데…세계 명작 소설을 이야기하실 때면 혼을 쏙 뺄 정도로 재미있었다.” 가수 현미도 이 학교에 다녔다. 가수 현미도 이 학교 다녀교가도 만들어졌다. 대구에 머물던 조지훈 시인이 노랫말을 지었다. ‘팔공산 높은 봉은 백두산 줄기/삼각산 큰 기상을 여기서 본다/자유 찾아 남쪽 하늘 먼길에 모여…(하략)’뉴욕타임스는 1951년 한국의 전쟁 속 학구열을 세계에 알렸다. ‘학생들은 교외 어떤 산 위에서, 옛 일본 신사에서, 개천에서, 그리고 산골짜기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남한의 어디를 가든지….’서울 피란 대구연합중학교는 전쟁이 끝난 1954년 3월 문을 닫았다. 전쟁 속에서도 교육은 계속돼야 한다는 신념이 오늘의 한국을 만든 것이다. 내전으로 이국을 떠도는 세계의 난민들이 귀 기울일 만한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이다.대구교육박물관은 당시 대구연합중학교에 근무한 선생님과 관련한 연락처나 자료를 지금도 수소문하고 있다.
중앙일보 2018-07-21전란 속 시인 마종기·가수 현미·채현국 이사장 등에 ‘희망의 빛’
‘우리학교는 서울 피난 학교다/ 쓰러져 가는 하꼬방 집이다/ 겨울엔 창문으로 무섭고 찬 바람이 불었다/그렇다/ 배움에 끓는 학도들은/ 연상 손을 호-호 불면서 공부를 했다/ 앞날의 희망을 보고/ 쓰라린 고통도 잊은 것이다…(하략)’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월. 당시 중학생이던 마종기 시인은 영남일보에 ‘우리학교’라는 시를 발표한다.소년 마종기는 그때 그 시절 피란학생의 고단한 삶을 그렇게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러면서 ‘앞날의 희망을 보고 배움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시에 담았다.당시 마종기는 아버지인 아동문학가 마해송을 따라 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하고 있었다. 마해송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쓴 작가로, 당시 공군종군문인단 단장을 맡고 있었다.마종기가 시에서 그려낸 ‘우리학교’는 서울에서 대구로 피란 온 학생을 위해 개교한 ‘서울 피란 대구연합중학교’였다.이 학교는 전란 중 피폐함 속에서도 배움의 길을 잇게 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며, 지금도 한국 교육사에 명징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대구로 몰려든 피란 서울학생6·25전쟁이 일어나자 대구에는 40여만명의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피란살이는 혹독하고 참혹했다. 구호물자는 넉넉지 않아 생계조차 막막했다.무엇보다 피란 학생의 교육이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대구는 전쟁의 직접적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학교 건물을 군에서 사용해 교육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다.피란 학생까지 수용할 여력은 당연히 없었다. 보다 못한 교사들은 노천수업으로 대신했다.칠판을 걸 수 있는 나무가 있고 아이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만 있으면 그곳이 ‘학교’였고 ‘교실’이었다.1951년 4월23일 뉴욕타임스는 당시의 모습을 전 세계에 이렇게 타전했다.‘학생들은 교외 어떤 산 위에서, 옛 일본 신사에서, 개천에서, 그리고 산골짜기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남한의 어디를 가든지, 정거장에서, 약탈당한 건물 안에서, 천막 속에서, 그리고 묘지 부근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그러던 중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1951년 봄 부산에서 피란 학생을 위한 학교가 속속 들어선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대구에 머물던 서울시 교육 관계자들도 곧바로 ‘작업’에 나섰다. 이들은 당시 달성군청에 있던 서울시 연락사무소에서 회의를 열고대구 피란학교 설립을 위한 본격적 논의에 들어갔다. 정부도 팔을 걷었다.그해 6월21일 백낙준 문교부 장관은 한국 학생의 교육재건을 위해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우리는 도움이 절실하다”며 미국을 집요하게 설득했다.◆서울 피란 대구연합중학교의 탄생정부와 교육관계자의 노력은 얼마 후 결실을 봤다. 1951년 9월20일 ‘서울 피란 대구연합중학교’(이하 대구연합중)가 마침내 문을 열었다.학교는 대구 중구 남산동 옛 일본 육군 관사 자리에 들어섰다. 미국의 교육시설 원조계획(CAC 원조계획)에 따라 임시 교실이 지어졌다.공식 인가된 학교였다. 하지만 교실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학생들은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하코방 교실’에서 한여름 폭염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고,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와 맞서야 했다.당시 대구연합중 2학년이던 채현국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은 “판자로 만든 교실은 그나마 좋은 편이었다.어떤 교실은 천장만 있고 옆이 뻥 뚫려 있었다. 책상도 없이 긴 판자때기에 앉아 공부했다”고 회상했다.대구에서 발행된 학생 잡지 ‘학원’은 창간호에 대구연합중 탐방기를 실으며 “하코방 교실에서 글을 배우고 있는 이 나라 학생들의 모습은 눈물겹다.배움이란 이렇게도 소중한 것이며, 전쟁이란 이렇게 처참한 것인가”라고 묘사했다.피란민 40여만명 대구에 몰려부산 피란민 학교 개교 소식에대구거주 서울교육관계자 논의1951년 옛 日육군관사자리 개교판자로 대강 지은‘하코방’교실교실 하나에 110명 넘는 반도“힘든시절 학교갈때 가장 좋았다”종전 후 1954년 3월31일 문닫아대구연합중 규모는 13개 학급, 학생 2천425명(중학부 1천383명, 고등부 1천42명)이었다. 서울 학생이 대부분이지만 북한 출신도 적잖았다.입학 절차는 단순했다. 간단한 면접만 보면 됐다. ‘너 서울 어느 학교 다녔어? 국어 선생님 이름이 뭐였어?”라는 질문에 그에 맞는 답을 하면 바로 입학할 수 있었다.전쟁 중에 행정적인 증명서류를 갖추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교사는 모두 51명.이들 역시 서울지역에서 교편을 잡다가 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하던 중이었다.더러는 북에서 내려온 교사도 있었다.채 이사장은 “교실이 턱없이 부족해서 110명 넘는 반도 있었다. 판자 의자 하나에 4~5명씩 20줄에 앉아 수업을 받았다.그래도 선생님의 열의는 대단했고 학생은 배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고 말했다. 피란학교는 여느 학교처럼 교가도 있었다.교가의 노랫말은 대구에 머물던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붙였다.‘팔공산 높은 봉은 백두산 줄기/ 삼각산 큰 기상을 여기서 본다/ 자유 찾아 남쪽 하늘 먼길에 모여/ 큰 고난을 양식 삼아 뜻을 기른다/온 겨레 건지려는 맹세 속에서/ 그 이상 드높구나 대구연합중고등/ 연합중학 연합고등 거룩한 이름 길이두고 우리마음 거울이 된다’.◆피란 학생들이 말하는 ‘그때 그 시절’피란 학생들에게 대구연합중은 ‘희망의 빛’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배움의 끈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던 것.평양 정의여중을 다니던 가수 현미는 1·4후퇴 때 피란 와서 대구연합중을 다녔다. 그는 “가족 12명이 초가 단칸방에 살았는데,장사 나간 엄마 대신 동생들 돌보고 집안일도 도맡아 했다. 힘든 피란살이였지만 학교 갈 때가 가장 좋았다.하지만 등교 때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두 살, 다섯 살짜리 어린 동생들을 상다리에 묶어 놓고 나와야 했다”며 아픈 기억을 끄집어 냈다.현미는 대구연합중 2학년 재학 중에 김백봉무용연구소에 들어가 ‘꽃초롱 오페라’ 단원이 되었고, 이후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현재 미국 올랜도에 거주하고 있는 마종기 시인은 “대구연합중 시절이 작가가 된 계기였다”고 했다.그는 “국어시간에 배운 세계명작에 흠뻑 빠져 글을 쓰게 됐다. 그때부터 잡지나 신문에 글을 투고했고 작가의 꿈을 꾸게 됐다.방과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영남일보 신문을 팔았다. 책보에 신문 20장 정도 돌돌 말아 들고 ‘내일 아침 영남일보’를 외치며 대구역 앞을 뛰어다녔다”고 회상했다.채현국 이사장은 “아홉 끼를 굶어 학교에서 쓰러진 적도 있다. 그때마다 배곯는 제자들을 보듬어준 분이 당시 국어 담당이었던 김소영 선생님이다.선생님은 자기 집으로 아이들을 데려가 자기 식구 먹을 밥까지 내주셨다. 피란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이 대구연합중이었다”고 말했다.‘서울 피란 대구연합중학교’는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3월31일 문을 닫았다.지금도 이 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교가를 잊지 않고 흥얼거리며 그때의 기억을 가슴 한 편에 새겨 두고 있다.
영남일보 2018-06-26동촌판자촌 풍속화·원조공책...‘전쟁속의 아이들’ 특별전
대구교육박물관은 6·25전쟁 당시 대구 피란학교를 재조명하는 ‘한국전쟁, 대구피란학교-전쟁 속의 아이들’ 특별전을 열고 있다.10월30일까지 열리는 특별전에서는 ‘서울 피란 대구연합중학교’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판자로 지은 ‘하코방 교실’을 비롯해 당시 교과서(‘전시부독본’ ‘침략자는 누구냐?’ 등), 미국으로부터 원조 받은 공책, 학교장 명의의 상장, 졸업장 등 연합중에 사용된 실제 사료를 만나볼 수 있다. 이 밖에 피란시절 동촌의 판자촌을 생생하게 표현한 김성환(‘고바우 영감’을 그린 시사만화가)의 풍속화와 전쟁음식이 눈길을 끈다. 피란지 대구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영화 ‘태양의 거리’(1952)도 감상할 수 있다.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 관장은 “특별전을 통해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에게는 그 시절을 돌아보며 기억하는 시간을 갖고, 어린 학생에게는 교육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남일보 2018-06-26대구교육박물관 10월30일까지 '한국전쟁 대구피난학교' 특별전
대구교육박물관(관장 김정학)은 오는 10월30일까지 6·25전쟁 당시 피난학교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국전쟁, 대구피난학교-전쟁 속의 아이들’ 특별전을 개최한다.이번 특별전은 전쟁의 처참함과 아픔 속에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학생들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한 대구교육의 힘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교육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당시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의 재학생이었던 가수 현미, 시인 마종기, 공학박사 이경화,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등의 증언을 수집하고, 학생들의 기억을 모아 당시의 교사(校舍)를 재현했다.이들의 인터뷰에는 학교의 위치, 교사의 생생한 모습, 당시 학생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들에게 대구는 전쟁의 피폐함을 이겨낼 수 있는 풍요로운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한 곳으로 기억되고 있었다.특히 이번 인터뷰에서 마종기 시인은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교가의 가사를 기억해 내 눈길을 끌었다. 마 시인과 함께 공부했던 재미동포 김동근은 이를 듣고 악보를 만들어 노래를 불렀으며, 이경화 박사가 하모니카 연주까지 더해 잊혔던 피난학교의 교가가 발굴됐다.또 이번 특별전에서는 피란지 대구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영화 ‘태양의 거리’(1952)를 만나볼 수 있다. 60분 분량으로 제작된 원작은그 중 45분 정도가 유실됐는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복원했다. 이 복원영상을 15분 분량으로 편집해 전시실 내 영상모니터를 통해 상영한다.이 영화는 6·25전쟁 당시 국내에서 제작됐던 영화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대구자유극장이 제작, 민경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영화는 피란민촌에서 일어나는 학생들의 이야기와 피란민의 고단한 삶을 담고 있다.많은 볼거리도 전시된다. 그 시절 애지중지했을 철제 필통과 교과서인 ‘전시부독본’ ‘침략자는 누구냐?’와 졸업장, 공책 등 다양한 문서와 문구들을 선보인다. 당시 급식을 재현한 주먹밥, 옥수수 가루로 만든 죽, 옥수수빵 모형도 볼 수 있다.피란시절 동촌의 판자촌을 세밀하게 그려낸 시사만화가 김성환의 풍속화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당시를 기억하는 코너도 마련된다.김정학 관장은 “특별전 ‘한국전쟁, 대구피난학교-전쟁속의 아이들’을 통해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들은 그 시절을 돌아보며 기억하는 시간을 갖고,어린 학생들은 교육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남일보 2018-06-18대구교육박물관, ‘한국전쟁, 대구피난학교-전쟁 속의 아이들’ 개관특별기획전 개최
대구교육박물관은 개관을 기념하고 6·25전쟁 시기의 피난학교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6월 15일(금)부터 10월 30일(화)까지 ‘한국전쟁, 대구피난학교-전쟁 속의 아이들’ 특별전을 개최한다. 이번 특별전은 전쟁의 처참함과 아픔 속에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학생들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한 ‘대구교육의 힘’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대구교육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당시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의 재학생이었던 △가수 현미 △시인 마종기 △공학박사 이경화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 채현국 등 인사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출신 학생들의 기억을 모아 당시의 교사(校舍)를 재현하였다.그들의 인터뷰에는 학교의 위치, 교사의 생생한 모습, 당시 학생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으며, 그들에게 대구는 전쟁의 피폐함을 이겨낼 수 있는 풍요로운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한 곳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특히 이번 인터뷰에서 미국에 살고 있는 마종기 시인은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교가의 가사를 기억해 내고, 함께 공부했던 재미동포 김동근이 채보하여 노래를 부르고, 여기에 공학박사 이경화의 하모니카 연주까지 더해 잊혀졌던 당시 피난학교의 교가가 완벽하게 발굴되었다. 또한 당시 대구 공군문인단에 근무하던 시인 조지훈이 교가를 작사하였다는 점 또한 관심을 더한다.또한 이번 특별전에서는 피난지 대구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영화 ‘태양의 거리’(1952)를 만나볼 수 있다. 원래 60분으로 제작된 원작은 그 중 45분 정도의 영상이 유실되었는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그 유실부분을 복원하였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이 복원영상을 15분 분량으로 편집하여 전시실 내 영상모니터를 통해 상영한다.‘태양의 거리’는 한국전쟁 당시 국내에서 제작되었던 영화들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영화로, 대구자유극장이 제작하고 민경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는 피난민촌에서 일어나는 학생들의 이야기와 피난민의 고단한 삶, 그리고 피난지에서 우굴거리는 불량아들을 선도하여 밝고 명랑한 거리로 만들어 가는 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애환을 담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유물 또한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 시절 애지중지했을 철제 필통과 교과서인 ‘전시부독본’ ‘침략자는 누구냐?’와 졸업장, 공책 등 다양한 문서와 문구들이 전시되고, 그 시절의 급식을 재현한 주먹밥, 옥수수 가루로 만든 죽, 옥수수빵 모형도 선보인다. 또한 피난시절 동촌의 판자촌을 세밀하게 그려낸 시사만화가 ‘고바우 영감’ 김성환의 풍속화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면서 당시를 기억하는 코너도 마련된다.김정학 대구교육박물관 관장은 “특별전 ‘한국전쟁, 대구피난학교-전쟁속의 아이들’을 통해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에게는 그 시절을 돌아보며 기억하는 시간을 갖고, 어린 학생들에게는 교육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에듀동아 2018-06-14전쟁 중에도 놓지 않은 배움의 끈
대구교육박물관은 개관을 기념하고 6`25전쟁 시기의 피난학교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고자 오는 10월 30일까지 특별전 '한국전쟁, 대구피난학교-전쟁 속의 아이들'을 연다.피난 학교는 전쟁의 처참함과 아픔 속에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던 지역민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6`25전쟁 당시 대구를 비롯해 부산, 대전, 거제도, 제주도 등에 피난학교가 설립됐다.1951년 9월 20일~1954년 3월 31일 기간 대구 대봉동 옛 육군관사 자리에 있었던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는 대구로 피난 온 서울학생을 위해 개교한 학교이다.당시 중`고등부를 합쳐 2천400여 명의 학생들이 이곳을 거쳐 갔고, 이 중에는 마종기 시인, 가수 현미,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등이 이곳에서 꿈을 키웠다.대구교육박물관이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이들로부터 수집한 증언에는 대구 피난학교가 당시 사람들에게 전쟁의 피폐함을 이겨내는 정신적 자양분으로 작용했다고 기록돼있다.마종기 시인은 "그 학교(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가 없었으면,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을 것이다. 학교에 대해 고마운 생각, 좋은 느낌이 있다"고 피난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또 가수 현미는 "대구, 힘든 시절이었지만 그 좁은 방에 형제들끼리 누워 노래책 보고 불렀던 그 시절이 좋았다. 극장에 몰래 들어가서 보기도 하고, 가수가 된 원천지가 대구다"고 회고했다.
매일신문 2018-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