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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삶, 나는 산업체 부설학교 학생입니다

공장으로 향한 소녀들

일찍부터 섬유산업이 발달한 대구

1950년대 이후 한국나일론, 제일모직, 한일합섬 같은 굴지의 섬유회사들을 비롯해 갑을방직, 동국방직, 신라섬유 등 다양한 섬유 생산 공장들이 대구에 자리 잡았다.
이른바 대구가 ‘섬유도시’가 되어 가는 과정 속에는 공장으로 향한 수많은 산업체 근로자들이 있었고, 이들 중에는 다수의 근로 청소년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15~16세의 어린 소녀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농촌에서 탈출해 교육의 기회를 얻기 위해 노동 현장 속으로 뛰어들었다.
화려한 경제 개발의 뒤편에서 묵묵히 고단한 노동 현장을 지켜낸 누군가의 딸이자 누이였고, 언니였던 소녀들. 일명 산업역군이라 불린 그들은 지금의 산업 강국 대한민국을 만들고 수출 한국의 미래를 만들어 냈다.

대구의 섬유 산업

대구경북 지역에서는 근대적인 기계를 설치하여 실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섬유 기반의 공장들이 1910년대부터 일본인에 의해 설립되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제사공장

명칭 위치 창업연월 공장건평 노동자수 생산액(원)
합계
편창제사
(片倉製絲)
대봉동 1919.4 3,500 10 390 400 1,687,500
산십제사
(山十製絲)
동인동 1918.2 3,565 33 912 945 1,920,480
조선생사
(朝鮮生絲)
동인동 1919.5 745 35 609 644 1,531,533
산전제사공장
(山田製絲工場)
삼덕동 1926.6 6 - 8 8 2,800
김택제사공장
(金擇製絲工場)
덕산동 1924.6 26 1 22 23 18,480
소야전제사공장
(小野田製絲工場)
칠성동 1926.6 50 - 35 35 60,200
암정제사소
(岩井製絲所)
태평로 1925.7 7 2 15 17 19,700
○중제사소
(○中製絲所)
태평로 1917.6 11 3 11 14 15,200
여제사소
(余製絲所)
칠성동 1928.4 20 - 11 11 4,249
모제사소
(毛製絲所)
태평로 1920.7 25 - 14 14 14,462
신천제사소
(新川製絲所)
칠성동 1926.10 50 - 47 47 13,874
중천제사공장
(中川製絲工場)
영천군 1927.4 25 - 9 9 16,160
류제사공장
(柳製絲工場)
영천군 1927.4 18 2 2 4 3,399
합계 8,048 86 2,085 2,171 5,308,037

대한방직 전경

1976년
국토정보지리원

해방 이후, 섬유를 기반으로 하는 제사공장을 한국인들이 대거 인수하면서 대구는 섬유도시로 자리 잡게 된다.
제일모직, 코오롱을 비롯하여 1970년대에는 대구 칠성동과 침산동 지역을 중심으로 삼호방직, 내외방직, 대구견직, 침산나이롱, 금화직물, 인교직물, 화성섬유 등 많은 섬유회사들이 들어선다.

  • 대한방직 정방공정 모습

    1978년
    시간과공간연구소 제공

    열여섯의 나,
    차창에 손바닥을 대고 플랫폼을 내다본다.
    잘 있거라. 나의 고향.
    나는 생을 낚으러 너를 떠난다.
    - 신경숙 , 『외딴방』 중에서

    섬유공장에서는 노동집약적이고 단순 반복적인 작업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여성 노동자를 선호했고, 고향을 떠나 도시로 상경하는 어린 소녀들의 발걸음은 공장을 향하였다.

  • 대한방직 공장 내부 모습

    1978년 | 시간과공간연구소 제공

산업역군의 주역이라는 이름 아래

제일모직 공정모습

1956년
제일모직 40년사

국내 최초 소모사 브랜드 장미사 505 출시로 분주한 공장의 작업 모습이다.

공장으로 간 소녀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하고 새마을운동 노래를 불렀다. 1970년부터 실시된 ‘공장 새마을 운동’으로 소녀들은 자신들이 산업역군의 일원임을 뿌듯하게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짠 스웨터를 정작 자신은 입지 못하는 현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00억불 수출탑을 성취시킨 정성으로
새마음의 기치를
새마음 숨결이 제품 하나하나에
기업인과 종사원은 한 가족
모든 일에 열과 성을 다하는 기쁨
자랑스런 세대
-1979년 『새마음 길』 중에서

  • 제일모직 공정모습

    1954년
    시간과공간연구소 제공

    “크로스빙을 혼자서 검사대에 옮기다가 잘못하여 손을 다쳤다.
    손이 찢어졌다. 겁에 질려서 놀란 나머지
    엉겁결에 손을 잡고 마구 울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피를 바라보며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마구 쏟아졌다.”
    한일합섬사보 1985.9.30.

  • 대구공장 여사원 기숙사

    제일모직 40년사

    “기숙사 규율이 무척 엄했어요.
    손도 못 잡고 다니며, 좌·우측 한 줄로 서서 뒤꿈치 들고 조용조용히 다녀야 했고요.
    작업복마저도 다림질해서 입어야 했죠. 머리도 삐져나오지 않게끔 단정히 올려서
    꼭 모자를 써야 했고요. 하긴 이리 엄하게 교육받았으니
    ‘제일모직 다니면 선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중앙일보 2021.11.9.

  • 편직쉐타 작업광경

    1976년
    국가기록원

    8시가 되면 요란한 미싱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오전 작업.
    심한 소음 속에서 그녀들의 입은 굳게 다물어졌다. 대화를 하기에는 미싱 소리가 크고, 정해진 작업량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불량품은 임금에서 삭감했기에 밥 먹듯 철야가 이루어졌고, 공장의 엄격한 위계질서는 소녀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무엇보다 소녀들을 힘들게 한 것은 ‘공순이’ ‘여공’이라는 호칭 뒤에 따르는 사회적 시선, 그리고 어려운 형편으로 포기해야 했던 학업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1972년 노동청의 ≪여자 50인 이상 고용 사업체 명단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교 졸업이 33.6%로 가장 높았고, 중학교 졸업이 27.3%, 고등학교 졸업이 10.5%로 가장 낮았다.

    “처음엔 솜먼지에 목이 칼칼하고 기계 소리에 귀가 먹먹하더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어요.” 밤 당번인 요즘 그의 일은 밤 10시에 시작해서 다음 날 새벽 6시에 끝난다. 남들이 다 잠자는 동안 그는 내내 서서 정방기 사이를 종종걸음치며 기계의 이상을 체크한다. 이것도 처음엔 못 견뎌 고단하고 낮엔 잠을 못 자곤 했지만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밤 당번이 새벽 6시에 일을 마치면 아침 당번이 이어 오후 2시까지 일하고 그다음 저녁 당번이 밤 10시까지를 채운다. 이렇게 해서 방직기계는 24시간을 쉬지 않고 돌아간다.

    동아일보 1970.08.23.

사원 공채 모집

1957년
시간과공간연구소 제공

전시실 사진

ZONE 01

대구직조공장 조업 광경

1930년대 | 대구상공 70년사

대구전매지국 여직공 근무 모습

1931년 | 대구전매청 공영회 | 시간과공간연구소 제공

여직공 공정별 작업

1931년 | 대구전매청 공영회 발행 | 시간과공간연구소 제공

최근 업데이트 일시 : 2025/07/01 16:10: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