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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를 타고 온 사람들

알아가다

우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고 함께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문화사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이해하고 있을까요?
물론 과거에 비해 인식이 많이 변했습니다. 정부와 여러 사회단체의 노력으로 다문화사회를 수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함께 만들어 갈 미래를 고민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직도 함께 어울려 살기위한 노력은 더 많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시작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잘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단일민족일까요?

‘우리는 단일민족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단군신화를 모르는 한국 사람은 없지요.
하지만 단군 할아버지라는 한 명의 인물로부터 우리 민족이 시작되었다라고 믿지도 않습니다.
‘단일민족’의 사전적 정의는 한 나라의 주민이 단일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는 민족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사례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중국의 기자가 고조선으로 왔고 위만 역시 무리를 이끌고 중국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발해가 멸망하자 많은 유민들이 고려에 정착하였고, 거란과의 전쟁, 원간섭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고려에 귀화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 속 많은 귀화인들은 우리의 조상이 아닐까요?
그 후손들은 한국 사람이 아닐까요?

어머니가 된 여인들

국적이 다른 사람들끼리 결혼하는 것을 국제결혼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국제결혼이 시작되었을까요? 대표적인 예로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과 허황옥, 고려왕과 원나라 공주 간의 결혼이 있습니다.

  •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상

    경기도박물관
    가로 56.2cm 세로 73cm

    고려 제31대 왕인 공민왕恭愍王(1330~1374)과 그의 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그린 부부초상화이다. 원간섭기 동안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로 온 인후印侯(쿠라다이), 장순룡張舜龍(셍게, 三哥) 같이 고려로 귀화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러한 인적 교류를 바탕으로 고려와 원 사이에 다양한 형태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오늘날 즐겨 먹는 만두와 소주, 설렁탕, 족두리와 연지곤지도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김해김씨족보 金海金氏族譜

1868년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가로 33.2cm 세로 21.2cm

경상남도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시조는 가락국駕洛國을 세운 수로왕首露王이다. 김해 김씨는 혈통과 시조가 다른 여러 개의 종파가 있다. 수로왕계의 김해김씨와 일본인 사야가沙也可 김충선 金忠善의 후손인 사성賜姓 김해김씨는 모두 김해김씨라고 쓰고 있지만 서로 다른 성씨라 할 수 있다.

김해허씨족보 金海許氏族譜

1761년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가로 35.8cm 세로 23.4cm

가락국駕洛國을 세운 수로왕은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과 혼인하였다. 여러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손들 중 일부가 어머니의 성을 따라 김해 허씨로 살고 있다.

성(姓)의 시조가 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나라로 들어와 정착하고 살아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새로운 성씨와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임금으로부터 성씨와 이름을 하사받기도 하였고, 스스로 정착한 지역을 본관으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모하당집 慕夏堂集

조선
가로 20.6cm 세로 29.7cm

임진왜란 때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선봉장으로 참전한 일본인 사야가(김충선金忠善, 1571~1642)의 시문집이다. 3권 1책의 목판본으로, 이순신李舜臣·곽재우郭再祐·김성일金誠一 등과 무기 에 대해 주고받은 편지, 선조로부터 성명을 하사받고 감사하여 올린 상소, 귀화 과정, ‘모하’라는 당호를 정한 이유 등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다.

  • 두릉두씨족보 杜陵杜氏族譜

    1898년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가로 34.5cm 세로 21.7cm

    두릉두씨의 시조 두경녕杜慶寧은 송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진종의 왕위 계승 문제에 관한 상소로 인해 좌천되었다. 두 아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 고려로 귀화하였다. 그들은 궁지현宮池縣에 정착 하였는데, 오늘날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읍이다.

두사충결산도 杜思忠訣山圖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가로 24cm 세로 33.7cm

정유재란丁酉再亂(1597~1598) 때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대의 일원으로 왔다가 조선으로 귀화한 두사충杜思忠이 쓴 풍수지리서이다.

  • 이지란李之蘭 초상

    경기도박물관
    가로 72.7cm 세로 21.7cm

    이지란李之蘭(1331~1402)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기여한 개국공신이다. 여진족 출신으로 본명은 퉁투란티무르이다. 1371년(공민왕 20) 고려에 귀화하여 북청에 거주하며 이씨 성과 청해靑海(함경남도 북청군)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우리 역사상 많은 귀화인들이 있었지만 오늘 날까지 초상화가 남아 있는 귀화인은 이지란이 유일하다.

  • 청해이씨 세계단자 靑海李氏世系單子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이지란李之蘭은 이씨 성과 청해靑海를 본관으로 하사받아 청해이씨靑海李氏의 시조가 된다. 이에 속한 자손의 계통을 기록한 문서이다.

새로운 문화를 전하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던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의 문화에 대해 알아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문화 간의 융합이 일어나 새로운 문화로 발전됩니다.

HISTOIRE GENERALE DES VOYAGES

1749년
프랑스어번역본
국립해양박물관
가로 9.3cm 세로 15.3cm

여행의 역사에 대한 책으로, 하멜표류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하멜표류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인 하멜Hendrik Hamel(1630~1692)이 일본으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 하여 겪은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하멜표류기에는 하멜보다 이른 시기에 조선에 표류한 인물인 벨테브 레이Jan Janes Weltevree(박연朴淵)가 등장한다. 조선을 탈출하여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과 달리 벨테브레이는 조선에 귀화하여 화포제작 기술(홍이포紅夷砲)을 조선군에 알려주며 조선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조선후기
    국립중앙도서관
    가로 21.6cm 세로 33cm

    효종孝宗의 부마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1648~1723)이 효종·현종·숙종·경종 4명의 왕을 보필 하면서 궁중에 출입하며 보고 들은 것과 전해오는 말들을 기록한 책이다. 『공사견문록』은 총 4책으로, 그 중 4책 『한거만록』에 벨테브레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실려 있다.

  • 벨테브레이Jan Janes Weltevree(박연朴淵)가 태어난 마을

    박연이 태어난 마을인 알마르크Alkmarr*의 마을인 드레이프에는 그의 기념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알마르크Alkmarr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의 도시

대구를 이롭게 하다

  • 김충선 1571-1642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 장수. 본명 사야가. 전투에서 여러 번 큰 공을 세워 가선대부를 제수받고 김해 김씨, 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병자호란에도 출전해 공을 세웠다. 대구 우록동에 정착해 살면서 향리 교화에 힘썼다.

  • 두사충

    명나라 무장.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참여해 이여송, 진린과 함께 왜병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명나라의 멸망을 예견하고 조선에 귀화해 대구에 정착하였다.

  • 김보록 로베르 신부 1853-1922

    본명 Paul Achille Robert, 대구 계산천주교회 초대 주임신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77년 조선에 입국해 박해 중에 충청도와 경상도 사목을 담당하였다. 1886년 대구본당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계산성당을 건립하였고, 교회 발전은 물론 근대교육과 문물 보급 등 지역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 우드브릿지 존슨 1869-1951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 1897년 12월 대구에 부임했다. 대구 제중원을 설립해 가난한 병자와 나환자를 진료하며 의료 선교에 앞장섰다. 대구에 올 때 사과나무 묘목을 가져와 심어 사과의 보급자로도 알려져 있다.

  • 아서 J. 맥타가트 1915-2003

    미국 인디애나주 로건포스트 출생으로 1956년 대구의 미 공보원장으로 부임하였고, 1976년 부터 영남대학교 영문과 초빙교수로 재직하였다. 1955년 대구 미 공보원에서 열린 이중섭의 개인전에서 구입한 3점의 은지화를 뉴욕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다. 평생 수집한 토기와 자기 등 480여 점의 유물을 생의 마감을 앞두고 국립대구박물관에 기증했다.

  • 엠마 프라이싱거 1932~

    오스트리아 출신의 수도자로 1961년 한국에 와서 평생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하 였다. 한센병 환자 전문병원인 가톨릭피부과의원을 설립하였고, 한센인 구호단체인 릴리회와 나사업가 연합회 회장으로 일하며 한센인의 성형 수술, 사회 복귀와 자립을 도왔다.

  • 아담스 1869-1929

    1867년 미국 인디애나 주 출신으로 1895년 조선에 입국하여 1897년 지역 최초의 교회인 남문안교회(현 제일교회)를 설립하고 경북지역 곳곳을 다니며 선교활동과 교육사업에 힘썼다. 1906년 대구 계성학교를 개교하였다.

  • 아치볼드 플레처 1882-1970

    캐나다 출신의 의사이자 선교사로 1910년 대구의 의료선교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1913년 대구를 방문한 ‘인도와 동양지역 나환자선교회’ 창립자 베일리 부부의 도움으로 대구나병원(후에 대구 애락원으로 개칭)을 개원하여 한센병 환자의 치료와 재활을 위해 힘썼다.

  • 우니 나야 1911-1950

    한국전쟁 당시 국제연합한국위원단 인도 대표로 한국에 들어와 1950년 8월 12일 칠곡군 왜관 근처에서 임무 수행 중 지뢰 폭발로 사망했다. 전쟁 중이라 유해의 고국 송환이 힘들어 8월16일, 수성구 범어동 주일골에서 화장하였고, 12월 7일 같은 장소에 각계의 성금을 모여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 마사 스콧 브루언 1875-1930

    1901년 선교사인 헨리 먼로 브루언과 결혼한 직후 남편을 따라 대구에 왔다. 1902년 이디스 파커와 함께 남문안교회 구내의 초가에서 지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신명여자소학교를 개교하였다. 1907년 신명여자중학교를 개교하고 교장으로 부임하여 대구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손님 아닌 가족으로

한국은 다문화사회에 진입했습니다. 어디를 가든 외국인이 보이며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는 한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들, 국제결혼으로 가정을 이룬 사람들도 있으며, 여행객, 유학생, 취업생도 있습니다. 모두 앞으로 우리의 친구가 되고 나아가 가족이 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과 ‘함께 어울려 살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다문화를 바라보는 시각

용광로 이론 Melting Pot Theory
샐러드 볼 이론 Salad Bowl Theory

오늘날 다문화를 이야기하면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인용되는 이론은 ‘용광로 이론’과 ‘샐러드 볼 이론’입니다. ‘용광로 이론’은 다문화사회에서 각 집단의 문화를 한데 모아 용광로에 넣어 녹이듯 하나의 문화로 만든다는 것이고 ‘샐러드 볼 이론’은 샐러드처럼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이 상호존중하며 각각의 색과 향기로 조화로운 통합을 이룬다는 논리입니다. 우리가 다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 이론에 가까울까요?

전시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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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NE 02

가로 60㎝ 세로 3㎝

길이, 너비, 두께 등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도구.

줄자

지름 12㎝

띠로 된 줄자. 길이, 너비, 두께 등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종이줄자

가로 100㎝ 세로 2㎝

종이재질의 줄자. 길이, 너비, 두께 등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인치(inch)와 센티미 터(cm)가 표시되어 있다.

목화저울

길이 12~61㎝

목화솜의 무게를 재던 저울.

약저울 藥衡

가로 39.5㎝ 세로 20㎝

약재의 정확한 양을 재기 위해 사용하는 기구로 약방저울이라고도 한다. 한 쪽에 약재를 올리고 다른 한 쪽에 추를 올린 후 수평을 만들어 약재의 무게를 측정한다. 약저울은 대체로 크기가 작고 정밀하며 고급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이 약저울은 상아로 만들었다.

옛저울

가로 39.5㎝ 세로 20㎝

약재의 정확한 양을 재기 위해 사용하는 기구로 약방저울이라고도 한다. 한 쪽에 약재를 올리고 다른 한 쪽에 추를 올린 후 수평을 만들어 약재의 무게를 측정한다. 약저울은 대체로 크기가 작고 정밀하며 고급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이 약저울은 상아로 만들었다.

주판 籌板

가로 33㎝ 세로 11㎝ 두께 3㎝

계산할 때 사용하던 도구. 나무로 만들어진 주판이다. 총 21줄로, 윗줄은 1개, 아랫줄은 4 개의 주판알을 끼웠다. 주판알을 둥글게 다듬은 것이 특징이다.

지름 32㎝ 높이 33㎝

곡식이나 가루, 액체의 양을 측정하기 위한 단위이자 그릇. 둥근 형태이고, 나무로 만들어 졌다. 1말은 10되로, 약 18L이다.

가로 17㎝ 세로 17㎝ 높이 10㎝

곡식이나 가루, 액체의 양을 측정하기 위한 단위이자 그릇. 정방형의 형태로 나무로 만들어 졌다. 1되는 0.1말로, 약 1.8L이다.

산가지

지름 6.5㎝ 높이 10㎝

대나무 등으로 만든 막대를 일정한 방법으로 늘어놓아 숫자를 계산하는데 사용하는 도구. 산통과 산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산통은 팔각형이고, 산가지는 가늘고 긴 막대기 형태이다.

돈통

가로 23.5㎝ 세로 31㎝ 높이 21㎝

돈을 넣어 보관하던 통.

黑笠

지름 37㎝ 높이 14㎝

조선시대 성인 남성이 쓰던 모자. 주로 말총, 대나무 등을 이용해 만들었다. 머리에 쓰는 모자와 차양인 양태로 구성되어 있다.

백립 白笠

지름 30㎝ 높이 14㎝

대나무로 틀을 잡고 흰 천을 덧대어 만든 갓. 주로 상복과 함께 착용하였다.

탕건宕巾

지름 15㎝ 높이 15㎝

앞쪽은 낮고 뒤쪽은 높은 형태로, 망건 위에 썼다. 말총을 엮어 만들었다.

망건

길이 12~61㎝

목화솜의 무게를 재던 저울.

흑혜 黑鞋

길이 24㎝

검정색 가죽으로 만든 신. 운두가 낮고 신코가 넓적하며 가장자리에 흰색 선을 둘렀다. 모 양이 태사혜(사대부나 양반계급의 나이 많은 사람이 평상시에 신던 신)와 같으나 태사문(신발의 코와 뒤축부분에 새겨 넣은 흰 줄무늬)이 없다.

비녀

길이 13.5회

혼인한 여성의 쪽머리가 풀어지지 않도록 꽂는 장신구. 금, 은, 옥, 칠보, 비취 등 신분에 따라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가위

수염을 손질할 때 사용하는 빗과 가위이다.

뒤꽂이, 빗

길이 10외

빗치개

길이 12외

가르마를 타거나 머리에 기름을 바를 때 사용하는 도구. 몸통에 음각으로 무늬를 새기기도 한다.

동곳 銅製簪

길이 5.7외

상투를 고정하기 위해 정수리에 꽂는 기혼 남성의 장신구이다.

유기 鍮器

놋쇠로 만든 그릇으로 놋쇠는 구리에다 주석, 아연, 니켈을 섞은 합금이다. 유기의 종류는 크게 식기, 혼사용구, 제사용구, 불기류, 난방용구, 등잔류 등이 있다.

시장 환경 개선

예로부터 내려온 대구시장 자리는 전혀 손보지를 않아 비만 오면 진흙탕이 되는 까닭에 경 북도청에서 시장 주위에 하수구를 파고 토관을 묻는 배수공사를 7월 초에 완공하기로 하고 근처 우시장 수선공사는 농번기라 중단하였다는 소식이다.

<매일신보 1912. 6. 7.>

서문시장 이전

1922년부터 공사에 들어간 서문시장 이전 설비가 곧 완성 돼 신설시장으로 이전을 앞두고 있다는 내용이다.

<매일신보 1923. 3. 30.>

서문시장 이전 축하 잔치

1923년 4월 1일부터 신축시장으로 이전하고, 시장 상인들이 이 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4월 8~9일 양일간 기생들의 연주와 춤 등 여흥을 펼쳤는데, 매일 수만 명의 사람들이 와서 대성황을 이루었다는 내용이다.

<매일신보 1923. 4. 13.>

서문시장 화재

서문시장 북로에 큰 불 6월 21일 오후 3시 반 시장북로에 있는 농기구상에서 발생한 불이 때마침 불어온 강한 동풍과 계속된 가뭄으로 인해 달성공원 쪽까지 번져 1시간 만 에 진화되었지만 전소 48호, 반소 13호의 피해가 발생하였고, 손해액은 약 5만 8400원으로 예상된다는 내용이다.

<부산일보 1927. 6. 22.~6. 23.>

콜레라로 인한 시장 휴점

1916년 가을 대구에 콜레라가 발생해 서문시장과 동문시장이 휴업 에 들어가며 전반적인 소비가 하락함과 동시에 극성을 부리던 콜레라도 어느 정도 잦아들고 있지만 시장 휴업 여파는 심각해 날품팔이로 생계를 잇는 사람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졌다는 내용이다.

<부산일보 1916. 10. 21.>

폭설로 점포 무너져

1923년 1월 대구에 무려 60센티가 넘는 폭설이 쏟아져 교통이 두절되고 우편과 신문 배달 마저 중단된 가운데 시내 관공서는 업무를 전폐하고 모두 제설작업에 열심인데 이 와중에 서문시 장 에서는 몇몇 점포가 무너져 손해가 컸다는 내용이다.

<매일신보 1923. 1. 18.>

시장통 전부 물바다

1924년 7월 21일부터 사흘간 이어진 호우로 인해 피해가 속출하였는데, 특히 동산 남쪽과 성주가도 부근에서 흘러내린 물이 전부 서문시장과 근처 인가를 급습하여 시장통과 달성공원 일대까지 다 잠기고 그 참상이 심각하다는 내용이다.

<조선일보 1924. 7. 25.>

대구부 시장 사용료 인하

극심한 경기 불황으로 인해 대구부에서 서문시장 상인들에게 징수하던 시장 사용료를 인하 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전체 38호 22명에게 갑호는 10월부 터 3월까지 3원, 11월부터 4월까지는 5원, 을호는 동일하게 2원 35전이었는 데, 이번에 갑호는 3원, 을호는 2원으로 가격을 내리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조선신문 1932. 10. 27.>

명신상회 과자틀

화장품

시간여행 소장

담배

시간여행 소장

양말, 내의

시간여행 소장

각종 원단

시간여행 소장

각종 원단

시간여행 소장

양복 원단지

시간여행 소장

달구대관

달구대관
가로 21㎝ 세로 29㎝
영남일보사 발행

웰컴 투 대구

최근 업데이트 일시 : 2023/11/21 10:0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