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 핵심 기능은 유통과 교환이지만, 그 대상은 물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시장은 한 날 한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인적교류와 정보 교환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므로 장터는 언제든지 축제의 장소로도 이용됩니다.
사람이 많이 보이는 시장에서는 죄인이 공개처형 되기도 하고 익명서가 나붙고, 전단지가 뿌려지기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특정 관료를 비난하는 익명서가 내걸리기도 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특정 정파를 비난하거나 혹은 지지하는 집회가 열렸고, 각종 궐기 대회가 일어난 곳도 모두 시장이었습니다. 선거철만 되면 대통령, 시장, 구청장 후보자들이 제일 먼저 찾아 ‘민생경제’를 외치는 곳도 바로 시장입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광문사에서 서상돈이 국채 1천 3백만원을 갚지 못하면 토지를 빼앗길 위기에서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석 달만 끊고 국채를 갚자는 내용의 국채보상 문제를 제의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찬성하였고, 김광재, 서상돈 등은 국채보상취지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반포하여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하였습니다.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반응은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서문시장에서부터 나타났습니다. 영세한 상인들은 시장에서 애써 번 돈을 아낌없이 의연금으로 내놓았고, 국채보상운동은 대구를 넘어 범국민운동으로 퍼져나갑니다.
시장은 흩어져 있는 민중의 힘을 모으는 곳입니다.
대구에서는 3월 8일 대구읍장이 열리는 장날을 기해 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거사 당일 장꾼으로 가장하여 태극기를 몰래 감추고 잠입한 시민과 계성, 신명, 대구고보 학생, 농민, 상인 등 수 천명은 시장 장터 한복판에서 이만집 목사의 주도 아래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선창에 이어 대형 태극기를 앞세운 채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가행진에 들어갑니다.
당시의 만세시위는 ‘서문시장(당시 대구장)-서문로 1,2가-서성로-조흥은행 서성로 지점-중부경찰서(당시 대구경찰서)-종로-대남한의원-동성로 3가(약령시)-대구백화점의 경로로 이동하였습니다.
선거철만 되면 대통령, 시장, 구청장 후보자들이 제일 먼저 찾아 ‘서민경제’를 외치는 곳, 바로 시장입니다. 하지만 시장은 정치판이 아닙니다.
시장은 세상의 이치과 우리네 삶의 진실을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100년 시장 서문시장에
늘 감도는 어떤 기운이 있다면 그건 대구시민들의 정의감일 것입니다.
뜻을 세우면 기어코 지켜내고 마는 정의감.
서문시장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100년을 지켜온 시민들의 삶의 현장입니다.
정치판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