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장시는 15세기 후반 경 전라도 지방에서부터 개설되기 시작하여 18세기 대동법大同法이 실시되면서 전국 각 지역으로 확산됩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벽의 북문 밖, 작은 장터로 시작한 ‘대구장’은 물자와 사람들이 몰리면서 보다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되고, 17세기 후반에 성곽의 서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성곽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문시장’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입니다.
장시란 물품을 생산하는 각 지방의 농민·수공업자와 물건을 파는 상인, 그리고 물건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교역이 이루어지는 농촌의 정기시장을 말합니다. 장場, 장문場門, 향시鄕市, 허시墟市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따르면 18세기 말에 전국에 개설된 장시의 수는 1,000여 개소에 이릅니다.
조선 후기
가로 21.1㎝ 세로 32.2㎝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 헌종 대 실학자 서유구徐有榘(1764~1845)가 쓴 농촌 경제에 관한 책. 아버지 서호수徐 浩修(1736~1799)의 『해동농서海東農書』, 할아버지 서명응徐命膺의 『고사신서攷事新書』와 『산 림경제山林經濟』 · 『북학의北學議』 · 『농가집성農家集成』 등 여러 국내 농서와 중국 문헌 등을 참 고하여 편찬된 농업 백과사전이다. 전시된 책은 예규지로 유통과 교역에 대한 부분을 담고 있다. 책에 의하면 전국의 시장 수는 1,052개소이고, 장시 거래의 주요 품목으로는 쌀, 콩, 보리, 목화, 무명, 삼베, 모시, 비단, 생선과 소금, 소와 송아지, 닭과 돼지, 담배, 철물, 가마 솥, 놋그릇, 종이, 자기, 토기, 목물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 거래 물품의 양은 쌀이 가장 많았으며, 그 외에도 무명, 채소, 연초 등의 생산과 소비가 많이 이루어졌다.
부보상負褓商이라고도 합니다. 보상(봇짐장수)과 부상(등짐장수)을 통칭하는 말로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제적 교환을 매개하던 전문적인 상인을 일컫습니다. 보상은 포, 면, 비단, 종이, 모시, 갓, 망건 등의 상품을 보따리에 싸서 이고 들거나 등에 짊어지고 다녔고, 부상은 생선, 소금, 나무 그릇, 무쇠로 만든 생활용품과 같은 상품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로 잘 알려진 서상돈(1851~1913) 역시 보부상 출신입니다.
평양장, 강경장과 함께 조선시대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로 알려진 서문시장.
하지만 서문시장이 처음부터 전국적인 큰 장터였던 것은 아닙니다. 17세기 까지 서문시장은 대구군 성벽 북문 밖에 자리 잡은 ‘대구장’이라고 불리는 작은 장터였습니다. 작은 장터였던 대구장이 번성한 것은 대구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대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두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그 위상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아울러 경상좌·우도가 통합되고 경상감영이 들어서면서 대구는 명실공히 정치·경제적 요지로 올라서게 됩니다. 대구의 성장으로 교통망이 확대되고, 대동법의 시행으로 공물로 수납되던 현물들이 향시로 쏟아져 나오면서 작은 장터였던 대구장의 거래량이 급격하게 늘어나게 됩니다. 대량의 물자와 사람들이 몰리면서 대구장은 종래의 북문 밖에서 더 넓은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 서문 밖으로 이전합니다. 장이 열리는 날이면 팔도의 상인들이 이곳으로 찾아들었고 시장과 일대의 객주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조선 후기
가로 19.8㎝
세로 31.8㎝ 계명대학교동산도서관 소장
조선 영조 대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읍지이다. 건치연혁, 군명, 관직, 성씨, 산천, 풍속, 장시 등 대구부의 행정, 문화, 생활 전반에 관한 인문지리서이다. 중요 관청, 지명, 인물, 경제에 관련된 변천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장시조場市條에는 서문시장을 읍장邑場이라 기록하고 있다. 매 2일과 7일에 서상西上에서 열렸고, 부府의 서쪽으로 3리 거리에 있다고 한다.
개항 이후, 일제의 식민자본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면서 서문시장에는 큰 변화가 나타납니다. 읍성 서문 밖에서 그 서남쪽에 있던 지금의 위치로 터전을 옮기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서문시장은 섬유산업을 토대로 더욱 성장하였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구 지역 사람들에게 경제적 토대가 되어 주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대구부부세일반 大邱府府勢一斑
일제강점기
가로 54.5cm 세로 39.0cm
서문시장이 이전하기 이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대구지도초판 大邱地圖初版
1918년
가로 46.7㎝ 세로 58㎝
대구근대역사관 소장
서문시장이 이전하기 이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일제는 식민지 경제체제를 확립하고 조선의 시장과 상업·유통망을 장악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과 병행하여 1913년부터 1917년까지 시장조사사업을 벌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령 제 136호로 「시장규칙」을 반포하여 한국 내 시장 장악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합니다.
「시장규칙」 은 전체 33개 조항과 수십여 개의 세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제1조는 시장을 제 1·2·3호로 분류한다는 내용인데, 1호 시장은 전통적인 조선시장, 2·3호 시장은 전통시장과 구분되는 이른바 ‘신식시장’입니다. 제1호 시장은 장옥場屋을 설치하거나 또는 설치하지 않았더라도 구획된 지역에서 매일 또는 정기적으로 다수의 수요자와 공급자가 내집內集해 화물의 매매교환을 행하는 장소‘로 규정되었습니다. 제1호 시장에는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을 비롯해 조선의 전통적 시장 대부분이 포함되었고, 다시 보통시장과 특수시장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제1호 시장에 대한 세금은 한말에 제정된 시장세 규정에 의해 판매액의 1/100을 거둬들였습니다. 그러나 세금 징수가 부작용을 낳고 상인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1926년에 일제는 제1호 시장에 대한 시장세를 폐지합니다.
제2호 시장은 공설소매시장을 말하며, ‘시장규칙’에 의하면 20인 이상의 영업자가 하나의 장옥에서 주로 곡물, 식료품의 판매업을 행하는 장소로 규정되었습니다. 제2호 시장은 공공기관이 도시 주민을 위해 개설한 식료품과 일용품 시장을 의미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생활 편의를 제공하려는 목적이 우선적이었습니다. 제2호시장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물가 폭등으로 인해 일본인의 생활 보호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면서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제1호 시장이 자연발생적 성격이 강한 방면 제2호 시장은 지방행정기관이 직접 시장 건물을 설치하고 판매인을 지정해 영업을 관리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제3호 시장은 “위탁을 받아 경매의 방법에 의해 수산물, 소채, 또는 과일의 판매업을 행하는 장소‘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3호 시장은 어채도매시장과 중앙도매시장으로 구분되며, 경매시장, 혹은 조매시장으로 불렀습니다.
시장규칙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린 「시장규칙」(1914년 9월)
「시장규칙」에 의해 ‘서문시장’은 1호 시장으로 분류되었고, 경영권은 대구부로 귀속된다.
일제에 의해 철도가 부설되고, 대구읍성이 철거되면서 대구의 도시공간은 더욱 확대됩니다. 도시가 외연적으로 확대되면서 성문 밖에 입지한 시장들은 더 외곽으로 확장, 이전하게 됩니다.
1922년 9월 28일 공설시장 개설 허가를 받은 서문시장은 도심에 주거지와 신작로 상권을 확장해야한다는 명분에 따라 1923년 읍성 서문 밖의 자리에서 현재의 자리로 위치를 옮깁니다. 시장은 천황당 못을 매립하여 만든 자리에 5개 지구를 구획·조성하였으며 전체 면적은 4544평이었습니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한 초창기에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하여 그 거래액이 동문시장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상인들의 거래가 늘어나면서 서문시장은 경상북도 전체 정기시장 거래액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 품목 | 곡물 | 소 | 조류 | 돼지 | 어류 | 소금 | 해초 | 채소 | 과일 | 신탄 |
|---|---|---|---|---|---|---|---|---|---|---|
| 상인 | 120 | 80 | 25 | 13 | 100 | 7 | 29 | 39 | 5 | 400 |
| 품목 | 직물 | 면하 | 실 | 기름 | 금속 | 종이 | 도자기 | 술 | 잡화 | 연초 |
| 상인 | 51 | 5 | 27 | 6 | 5 | 15 | 15 | 10 | 100 | 10 |
천황당못 전경
시가지의 상권 市街地の商圈
1926년
가로 15.2㎝ 세로 22.5㎝
두류도서관 소장
조선총독부 조사자료 제14집.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가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의 인구, 시장, 무역에 대한 통계를 수집하여 시가지의 상업 거래와 금융 사정에 대해 조사하여 작성한 연구 자료집이다. 주로 1924~1925년의 자료를 이용해 작성하였다. 주요 읍치에 위치한 시장의 거래 내역, 금융, 무역의 추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대구의 시장으로는 서문시장, 동문시장, 약령시 등을 다루고 있고, 각 시장의 거래액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의 시장경제 朝鮮の市場經濟
1929년
가로 15.2㎝ 세로 22.5㎝
두류도서관 소장
조선총독부 조사자료 제27집.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가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조선의 시장경제에 대해 조사한 뒤 작성한 연구 자료집이다. 조선시대 시장의 상황, 시장상인에 대한 조사를 하였다. 대구의 주요 시장으로 서문시장을 언급하고 있고, 어시장, 약령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1941년
가로 17㎝, 세로 23㎝
문정창 저
문정창이 조선의 재래시장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과 영향에 관하여 발간한 학술서로 일본의 평론사評論社에서 간행하였다. 내용은 3장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2장에서 시장에 관한 법령과 특수시장, 경매시장, 시장의 공영과 사영, 시장의 개시일, 시장의 대소와 경제권, 시장의 역할 등에 관 하여 고찰하고 있다. 특히 부록에서는 시장규칙과 재래시장 일람표가 수록되어 있으며, 1940년경의 시 장의 실상과 내용에 관하여 소개하고 있다.
1934년
가로 9.5㎝ 세로 17.5㎝
대구부의 연혁, 관광서, 교육기관, 언론기관, 신사, 종교, 산업 등을 기록되어 있다. 10장에 서는 시장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서문시장의 농산물, 수산물, 직물, 한약 등의 판매액이 기록되어 있다.
| 구분 | 서문시장 | 동문시장 | 월견산목탄시장 | 약령시장 | 생선야채시장 | 수산물시장 | 합계 | |
|---|---|---|---|---|---|---|---|---|
| 매출액 | 농산물 | 387 | 255 | - | - | 45 | - | 688 |
| 수산물 | 271 | 118 | - | - | 150 | 24 | 567 | |
| 직물 | 364 | 98 | - | - | - | - | 463 | |
| 가축류 | 559 | 10 | - | - | - | - | 569 | |
| 한약 | - | - | - | 495 | - | - | 495 | |
| 기타 | 612 | 287 | 135 | - | - | - | 1,034 | |
| 합계 | 2,194 | 771 | 135 | 495 | 195 | 24 | 3,820 | |
| 일 수 | 66 | 65 | 360 | 40 | 345 | 187 | ||
| 비 고 | 음력 매월 2, 7일 개장 | 동 매월 4, 9일 개장 | 매일 개장되며 휴장 없음 | 계절 한정 개장 | 동 | 동 | ||
| 연도 | 서문시장 | 동문시장 | 월견산목탄시장 | 약령시장 | 생선야채시장 | 수산물시장 | 합계 |
|---|---|---|---|---|---|---|---|
| 1931년 | 2,008 | 717 | 96 | 310 | 202 | - | 3,333 |
| 1932년 | 1,986 | 722 | 125 | 375 | 188 | 73 | 3,471 |
| 1933년 | 2,194 | 721 | 135 | 375 | 199 | 24 | 3,820 |
대구의 시장은 옛부터 유명한 곳이다. 서문시장, 남문시장, 약령시장의 세 곳이 조선의 재래시장인데, 그 중 소위 ‘대구시장’으로 불리면서 명성이 높은 곳이 서문시장이다.
서문시장은 본래 대구 성곽의 서대문 밖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의 시장‘정’(町, 우리나라의 ‘동’에 해당), 시장북길이라는 이름에서 어느 정도 옛 시장 위치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서대문의 서쪽 약 300미터 자리, 옛 대구천 강가에 있었던 것으로, 이곳은 경부가도, 통영가도, 성주가도의 분기점이기도 했다. 경부가도를 북쪽으로 가면 군위, 의성, 안동 및 왜관, 선산, 김천 방향으로 통하며, 남쪽으로 가면 청도, 밀양에 이르렀으며, 통 영가도는 고령, 현풍, 성주의 세 방면으로 통했다. 이렇듯 교통상으로 사통팔달의 요지에 시장이 자리 잡고 있었 기에 물자의 집산, 교역에 있어서 가장 편리했던 것이다.
대구 시가지가 점차 발전함에 따라 시장 변경의 필요성이 생겼다. 1923년에 구시가지 서남쪽 골짜기에 있었던 늪 을 매립하여, 이곳에 시장의 설비를 갖추어 이전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의 서문시장이며, 이 시장은 규모, 설비 양 면에서 조선의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비되어 있다. 가로 세로 방향으로 폭 10여 미터 길을 경계로 하여 곡물, 야채, 수산물, 목재, 철물, 도자기, 목탄, 깔개, 직물, 잡화 등, 판매품 별로 질서정연하게 구획되 어 있으며, 따로 우시장도 갖추고 있다. 또한 시장 주위에는 상설 점포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음식점이 많은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장날은 2, 7일장이라 하여, 음력으로 2, 7로 끝나는 날에만 열림에 따라, 한 달에 6일 장이 열린다.
장날에는 시장 안은 물론, 주변 대로에도 사람과 물건이 넘치며, 통행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번잡 함이 수십 리에 이를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는 상태다. 장날에 모이는 사람은 시장에서 약 20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사람들로서 당일치기가 가능한 거리이다. 농부들은 농산품을 소, 말, 수레, 지게 등을 이용하여 반입하며 이 것을 판매해서 일용품, 수산물 등을 구입하여 귀로에 이른다. 그 밖에 시장상인(보부상)이라고 불리면서 각 지역의 시장을 떠돌아다니는 시장 행상인들도 있다. 과거에는 판매자가 대부분 여청도박물관성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남성 이 대부분이며, 유일하게 길가 음식점에서 여성들이 판매를 하고 있다. 1년 중 가장 성황을 이루는 장날은 음력 12월 27일로 섣달그믐장이라 불리며, 이날 설날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농작물 추수 직후에 성황을 이룬다.
서문시장의 1년 매출은 약 2백만 원이다. 이 수치는 조선의 1400여 시장의 매출 총액 약 1억 4천만 원, 시장 당 평균 약 10만 원과 비교하면 약 20여 배에 해당된다. 대구시장이 옛 부터 유명한 것도 이 때문이다. 판매품 중 수산물 매출 비중이 타 시장 대비 현저하게 높은데, 이는 수산물이 위탁 판매에 의해 대량으로 시골 장으로 도매 거래되기 때문이다.
남문시장은 동문시장, 또는 신시장이라고도 일컫는다. 옛 성곽의 남문 밖에 있었던 것이 동문 밖으로 옮겨졌기 때 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 이 시장은 서문시장보다 뒤에 개설되었는데, 현재는 덕산‘정’(町, ‘동’에 해당)에서 장이 열리며, 장날은 음력 4, 9로 끝나는 날이다. 시장 설비는 간소하여 대로 양쪽에 장이 펼쳐지며, 매출액도 서문시장 에 비해 그 절반에도 못 미쳐 연간 약 70여만 원이다.
어느 지방이나 과거에는 모두 시장이 흥하였으나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 내지에서는 욧카이치(四日市, ‘사일장’ 이라는 뜻), 요카이치(八日市, ‘팔일장’이라는 뜻) 처럼 지역 이름에 시장 의 흔적만 남아 있는 곳도 있으나, 조선에 서는 지금도 시장이 성황을 이루고 있어 농가의 거래는 대부분 시장에서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대구의 서문시장 이나 남문시장처럼 규모가 큰 곳은 드물다.
해방과 6.25전쟁 이후 서문시장은 전국 최대의 의류 도매시장으로 성장합니다.
전쟁으로 전국의 피난민들이 대구로 몰리면서 인구가 급증하게 되었고, 피난민들은 생필품을 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했습니다. 일제가 건립했던 섬유 공장은 다행히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대구의 섬유시설을 기반으로 사업을 육성하였습니다.
대구의 섬유 생산량이 전국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면서 대구는 섬유도시의 기반을 갖추게 되고, 이와 함께 서문시장은 전국 최고의 포목 판매시장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서문시장 풍경
전국 최대 의류 도매시장으로 성황을 누리던 서문시장은 화학섬유의 시장 장악과 산업화 진행으로 과거의 명성을 조금씩 잃어갑니다. 여기에 크고 작은 화재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시장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상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 나가며 시장의 옛 명예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파괴된 산업시설의 복구가 이루어지면서 각 지역의 시장들은 조금씩 제 기능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는 화학섬유가 시장을 장악하면서 포목중심의 서문시장의 상권이 조금씩 위축됩니다. 공업위주의 경제 발전을 기반으로 대도시들은 ‘산업도시화’ 되고,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한 교통망의 발전은 상권의 확대를 불러오면서 서문시장의 도매 기능이 약화됩니다.
1923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이래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발생합니다. 기록된 화재만 20여 건에 이릅니다. 특히 1975년 11월에 발생한 대형 화재는 대구 경제를 휘청거리게 할 정도로 그 여파가 컸습니다. 하지만 화재가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 후에도 상인들은 건물을 새로 짓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삶터를 다시 일구어 냈습니다.
| 일시 | 화재 원인 | 내용 | 비고 |
|---|---|---|---|
| 1951년 10월 20일 | 방화 | 1옥 4,000여만 환 | |
| 1952년 2월 24일 | 촛불 | 5억 3,400만 환 점포 4200개 소실 사망 1명 | 시장 전체 소실 |
| 1952년 12월 26일 | 화롯불 | 15억 환 부상 3명 | |
| 1960년 2월 5일 | 촛불 | 536만원 | |
| 1960년 6월 16일 | 유류 | 46억 8,700여만 환 점포 63개 소실 43명 부상 | 시장 전체 소실 |
| 1961년 2월 15일 | 불명 | 2억 4300여만원 소방관 1명 부상 | |
| 1967년 1월 1일 | 전기 | 1억 8600만원 점포 372개 소실 소방관 1명 부상 | 1지구 전소 |
| 1968년 11월 3일 | 난로과열 | 9,800만원 | |
| 1970년 2월 4일 | 난로과열 | 100만원 | |
| 1975년 11월 20일 | 담뱃불 실화 | 20여억원 점포 1900여개 소실 | 4지구, 1지구 2층 전소 |
| 1976년 12월 17일 | 성냥불 실화 | 11억 4,000여만원 점포 650여개 소실 6명 부상 | 3지구 전소 |
| 1977년 2월 4일 | 불명 | 점포 150개 소실 | |
| 1978년 12월 1일 | 불명 | 1,100만원 | |
| 1996년 11월 1일 | 전기합선 추정 | 2지구 1층 | |
| 1997년 7월 30일 | 전기합선 | 1억 4000여만원 점포 9개 소실 | 건어물전 화재 |
| 2005년 12월 29일 | 전기합선 추정 | 683억원 점포 1000여개 소실 | 2지구 전소 |
| 2016년 11월 30일 | 불명 | 469억원 점포 679개 손실 | 4지구 전소 |
화재는 시장의 공간을 재편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임시주차장을 만들고 주차 빌딩 건설을 추진했으며, 냉난방 설비를 갖추고 다양한 고객 편의 시설을 유치해 시장을 찾는 발길이 끊어지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대형마트에서는 볼 수 없는 흥성거림과 다양한 볼거리, 야시장 개장과 시장의 현대화는 앞으로의 서문시장이 나아갈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일러스트(서문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