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입지立地에는 지리적 조건 외에도 산업, 교육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중에서도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도로는 도시의 성장과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지역 간 이동이 쉽지 않았던 과거에는 그 영향이 더욱 컸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동래로 이어지는 영남대로 상에 위치하고, 낙동강을 통한 수로 교통이 발달한 곳이었던 대구는 지금도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가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대구의 도로 변화는 이동수단의 변화 과정에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치열했던 우리나라 근대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대구읍성은 이러한 시대의 격랑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대구의 뛰어난 입지는 주변 각 지역으로 연결된 도로망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의 도로 중 대구가 위치한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출발해 동래까지 이어지는 길로 팔달교 부근에서 금호강을 건너 대구로 들어와서 읍성 서문에서 성을 둘러 남문까지 연결된 후, 봉덕동에서 신천을 따라 내려가 팔조령을 넘는 길이었다. 읍성 서문에서는 대신동, 다사, 하빈을 지나 성주로, 그리고 성당로, 앞산과 학산 사이를 지나 고령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었고, 동문에서는 아양을 지나 영천으로, 남문에서는 경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하빈에서 대구와 만나는 낙동강은 일찍부터 물길을 이용한 수로교통이 발달했던 곳으로, 김해에서 안동 영호진映湖津까지 이어져 조정에 보내던 세미 운송의 기착지로 사문진이 이용되는 등 각 지역 물류의 운송과 유통 통로로 이용되었다.
1905년 개통된 경부선 철도 급행열차는 15일 가량 걸리던 서울과 부산을 11시간 만에연결해주었다. 당시로는 혁신적이었던 이 근대 문물의 등장은 대구의 도시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대구를 지나는 경부선 철도는 영남대로의 길목에 자리하여 도시의 관문으로 오랜 세월동안 북적여 온 읍성의 남문을 지나지 않고, 경산군 고모역에서 성 동쪽을 크게 돌아 북문 밖을 지나도록 부설되었다.
이 지역은 경부선 철도 부설공사의 시작과 함께 급속도로 유입된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곳으로 대구역이 건립되면서 새로운 번화가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경부선의 개통과 함께 대구로 들어온 일본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대구읍성 철거였다. 철거 명분은 성벽이 대구의 근대 도시로의 발전을 저해시킨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대구역과 읍성 내부가 연결되는 시가도로의 개설을 통해 지역 내 상권을 장악하고자 함이었다. 이들 편에 서서 읍성 철거에 앞장섰던 사람은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 군수였던 박중양朴重陽(1874-1959)이다. 훗날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그가 읍성 철거에 대한 허가를 조정에 구하기 위해 올린 보고서에는 일본인들이 바라던 도로 개설과 상권 확장에 대한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읍성 철거를 불허하였지만 답변이 내려오기도 전에 읍성 철거는 진행된다. 대구읍성은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를 받은 박중양이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한 1908년,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報告書
大邱府城堞이 年久야 土石이 處處崩壞에 但有妨於行路일 더러 實是危險온 此
城堞을 撤去진 乃成廣可爲五間道路고 左右에 民戶는 由是而自然市肆를 作
삽기에, 大邱市廳으로 主管케 야 此事業을實行케 고져 玆에 報告오니 査照處分
시믈 伏望。
光武十年十月〈日〉
慶尙北道觀察使署理大邱郡守朴重陽
대구부의 성첩은 축성한지 오래되고 토석이 곳곳에 붕괴되어 행로에 방해가 될뿐만 아니라 실로 위험한 지경이온데, 이 성첩을 철거한다면 5간의 넓은 도로를 만들 수 있고 길 좌우의 집들은 자연히 상가를 이룰 수 있삽기에 대구군으로 주관케 하여 이 사업을 실행하고자 이에 보고하니 살피어 처분하심을 바라나이다.
광무10년(1906) 10월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
원래 대구읍성의 성벽이 위치했던 자리로 중앙정부로부터 도로건설비 19,949원을 교부받아 철거된 읍성을 따라 순환도로를 건설하였다. 이때 붙여진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라는 도로명이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대구부청(현 대구시청)에서 경상감영공원이 있는 동문로를 거쳐 서문로로 이어지는 길과 북성로에서 남성로로 내려오는 길이 교차하는 도로이다. 현재의 경상감영길과 종로에 해당한다. 이 십자대로를 중심으로 당시 경찰서, 헌병대, 조선식산은행(현 근대역사관), 대구우편국 등이 들어섰다.
대구역에서 태평로를 지나 읍성 내부에 해당했던 시가지를 통과하는 형태의 중앙로가 신설된다. 현재의 대구역 지하차도에서 중앙대로로 연결되는 길에 해당한다. 이 길의 등장으로 북성로, 중앙로, 서문로 등을 중심으로 번화가가 형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