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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읍성, 새로운 도시의 탄생

도로, 도시를 변화시키다

도시의 입지立地에는 지리적 조건 외에도 산업, 교육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중에서도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도로는 도시의 성장과 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지역 간 이동이 쉽지 않았던 과거에는 그 영향이 더욱 컸다. 조선시대, 한양에서 동래로 이어지는 영남대로 상에 위치하고, 낙동강을 통한 수로 교통이 발달한 곳이었던 대구는 지금도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가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대구의 도로 변화는 이동수단의 변화 과정에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치열했던 우리나라 근대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대구읍성은 이러한 시대의 격랑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한국경성전도
  • 말과 숙식 제공을 명하는 공문

    한국경성전도韓國京城全圖

    대한제국 1903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1903년 5월 30일 경부철도주식회사에서 제작한 것으로
    중앙에 축척 1:10,000의 경성 전도가 있고,
    좌측 상단에 축척 1:8,000의 부산일본거류지釜山日本居留地,
    우측 상단에 축척 1:8,000의 대구시가전도大邱市街全圖를 넣었다.
    경성 전도에 나타난 도로, 전기 철도, 경인 철도의 모습과
    격자로 구획된 부산일본거류지의 모습 등을 통해
    변화하는 근대 도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대구는 읍성이 존재하는 옛 도시의 모습임을 알 수 있다.

대구의 옛 도로

대구의 뛰어난 입지는 주변 각 지역으로 연결된 도로망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조선의 도로 중 대구가 위치한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출발해 동래까지 이어지는 길로 팔달교 부근에서 금호강을 건너 대구로 들어와서 읍성 서문에서 성을 둘러 남문까지 연결된 후, 봉덕동에서 신천을 따라 내려가 팔조령을 넘는 길이었다. 읍성 서문에서는 대신동, 다사, 하빈을 지나 성주로, 그리고 성당로, 앞산과 학산 사이를 지나 고령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었고, 동문에서는 아양을 지나 영천으로, 남문에서는 경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하빈에서 대구와 만나는 낙동강은 일찍부터 물길을 이용한 수로교통이 발달했던 곳으로, 김해에서 안동 영호진映湖津까지 이어져 조정에 보내던 세미 운송의 기착지로 사문진이 이용되는 등 각 지역 물류의 운송과 유통 통로로 이용되었다.

새로운 도로의 등장

1905년 개통된 경부선 철도 급행열차는 15일 가량 걸리던 서울과 부산을 11시간 만에연결해주었다. 당시로는 혁신적이었던 이 근대 문물의 등장은 대구의 도시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대구를 지나는 경부선 철도는 영남대로의 길목에 자리하여 도시의 관문으로 오랜 세월동안 북적여 온 읍성의 남문을 지나지 않고, 경산군 고모역에서 성 동쪽을 크게 돌아 북문 밖을 지나도록 부설되었다.
이 지역은 경부선 철도 부설공사의 시작과 함께 급속도로 유입된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곳으로 대구역이 건립되면서 새로운 번화가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 경부철도선로 약도

    대한제국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우리나라 및 동아시아 지역 철도 노선이 담겨 있는
    지도이다. 왼쪽에는 경인선, 경부선 등 우리나라
    남쪽 철도 노선도가 그려져 있으며 오른쪽에는
    우리나라, 일본, 중국 대륙과 대만 각지로 연결되는
    철로와 항로를 표시한 지도를 담았다. 당시 일본이
    우리나라를 거쳐 대륙까지 이어지는 교통망 연결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 경부철도 계약 안내문

    대한제국 1898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1898년(광무 2) 9월 8일 대한제국 정부와 경부철도주식회사
    발기인 사이에 체결된 경부철도 부설 계약에 대한 내용을 담은 문서이다.
    총 15개조의 조약 및 계약일, 계약 담당자 이름을 기재하였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권 실현을 목표로
    경부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1989년 9월 8일 한일 양국의 공동경영을 전제로 한
    경부철도합동조약京釜鐵道合同條約이 체결되었다.

  • 외국에서 철도를 부설하는
    제국회사에 관한 법률 및 칙령

    일본 1900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1900년(메이지 33)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 등이
    경부철도주식회사京釜鐵道株式會 원을 청원하는 글과 일본 정부가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지원하는 법이 있는 문서이다.
    앞면에 하단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 6명이 일본 정부가
    경부철도주식회사를 특별 보호를 하고 회사 자본금에 대하여 정부가
    이자를 지급해줄 것을 청원하는 내용이, 상단에는 정부가 청원을 받아들여
    제정한 법령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 경부철도주식회사 관련 설명서
    京釜鐵道株式會社 說明書

    일본 1901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경부철도주식회사京釜鐵道株式會社
    대해 설명한 문서이다.
    경부선 철도 개통으로 얻게 되는 효과,
    회사의 성립, 회사 중역 소개,
    경부선 철도 공사비 예산,
    경부선 철도 공사 등을 소개하고,
    제2회 주식 모집을 안내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 대구역 사진엽서

    일본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경부선 철도 부설과 함께 세워진
    대구역과 광장을 촬영한 흑백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사진엽서이다.
    1905년 문을 연 대구역은 서양 건축물
    형태를 따른 일본식 목조 건물로 당시
    지방 철도역 중 부산과 신의주 다음으로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경부선의 개통과 함께 대구로 들어온 일본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대구읍성 철거였다. 철거 명분은 성벽이 대구의 근대 도시로의 발전을 저해시킨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대구역과 읍성 내부가 연결되는 시가도로의 개설을 통해 지역 내 상권을 장악하고자 함이었다. 이들 편에 서서 읍성 철거에 앞장섰던 사람은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 군수였던 박중양朴重陽(1874-1959)이다. 훗날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대표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그가 읍성 철거에 대한 허가를 조정에 구하기 위해 올린 보고서에는 일본인들이 바라던 도로 개설과 상권 확장에 대한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읍성 철거를 불허하였지만 답변이 내려오기도 전에 읍성 철거는 진행된다. 대구읍성은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를 받은 박중양이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한 1908년,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報告書
大邱府城堞이 年久야 土石이 處處崩壞에 但有妨於行路일 더러 實是危險온 此
城堞을 撤去진 乃成廣可爲五間道路고 左右에 民戶는 由是而自然市肆를 作
삽기에, 大邱市廳으로 主管케 야 此事業을實行케 고져 玆에 報告오니 査照處分
시믈 伏望。
光武十年十月〈日〉
慶尙北道觀察使署理大邱郡守朴重陽

대구부의 성첩은 축성한지 오래되고 토석이 곳곳에 붕괴되어 행로에 방해가 될뿐만 아니라 실로 위험한 지경이온데, 이 성첩을 철거한다면 5간의 넓은 도로를 만들 수 있고 길 좌우의 집들은 자연히 상가를 이룰 수 있삽기에 대구군으로 주관케 하여 이 사업을 실행하고자 이에 보고하니 살피어 처분하심을 바라나이다.
광무10년(1906) 10월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

읍성 철거 후 대구의 도로 변화

사성로 1908 - 1909

원래 대구읍성의 성벽이 위치했던 자리로 중앙정부로부터 도로건설비 19,949원을 교부받아 철거된 읍성을 따라 순환도로를 건설하였다. 이때 붙여진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라는 도로명이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십자대로 1909 - 1912

대구부청(현 대구시청)에서 경상감영공원이 있는 동문로를 거쳐 서문로로 이어지는 길과 북성로에서 남성로로 내려오는 길이 교차하는 도로이다. 현재의 경상감영길과 종로에 해당한다. 이 십자대로를 중심으로 당시 경찰서, 헌병대, 조선식산은행(현 근대역사관), 대구우편국 등이 들어섰다.

중앙로 1917

대구역에서 태평로를 지나 읍성 내부에 해당했던 시가지를 통과하는 형태의 중앙로가 신설된다. 현재의 대구역 지하차도에서 중앙대로로 연결되는 길에 해당한다. 이 길의 등장으로 북성로, 중앙로, 서문로 등을 중심으로 번화가가 형성되었다.

전시실 사진

ZONE 03

전국 도로를 담은 기록
도로고 道路考

신경준申景濬
조선 1770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조선 후기 교통로에 대해 담아낸 지리서로 4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한양에서 전국 8개 도로 연결되는 길을 6개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이 중 대구를 지나가는 길은 동래로 이어지는‘경성동남저동래로제4로京城東南抵東萊路第四路’에 해당한다.

권1 34개의 능행로 및 한양에서 의주, 경흥, 평해, 동래, 제주, 강화로 이어지는 여섯 길에 대한 내용

권2 전국 8도 및 각 읍의 경계와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까지의 거리

권3 사연로(四沿路, 백두산연로·압록강연로·두만강연로·팔도연해로) 및 팔도의 역로 驛路와 대로大路·중로中路를 구분

권4 강진과 제주간의 해로 및 교린사행로(交隣使行路, 중국사행육해로·일본통신사해륙로· 유구국해로) 등 수록

부산까지 이어지는 수로
한강봉산욕행록 寒岡蓬山浴行錄

조선
경북대학교도서관 소장

한강 정구鄭逑(1543-1620)가 1617년 신병치료를 위해 제자들과 함께 동래로 온천 여행을 다녀온 전 과정을 그의 제자 이윤우가 기록한 책이다.
칠곡 지암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6박 7일이 걸려 동래에 도착한 일정을 통해 당시 대구에서 동래로 이어지는 수로를 알 수 있게 한다.
조선의 도로 곳곳에는 역참이 있었다. 역참은 교통, 통신시설로서 공공의 업무를 수행하는 곳으로 공무 수행을 위해 이동하는 관원들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는 외에도 국가의 명령을 지방으로 전달하거나, 변방의 긴급한 군정보고를 수행하는 등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연락망 역할을 하였다. 이 외에도 외국 사신의 영송과 접대, 공부貢賦와 진상품進上品의 운송을 담당하는 등 중앙집권국가의 운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말과 숙식 제공을 명하는 공문
초료 草料

조선
옛길박물관 소장

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동하는 자가 경유하는 각 관과 역참驛站에서 종인從人,마필馬匹, 숙식宿食 등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병조에서 발급한 문서이다.
제공받을 수 있는 종인과 마필의 수는 관품에 따라 달리 기재되었다.

공무 이동에 대한 기록
노문 路文

조선
옛길박물관 소장

조선 정해년丁亥年 강릉진 화포 도시都試 시관試官으로 참석하는 관리의 일정과 수행원을 명시한 노문으로 경상도 봉화군 상운역에서 작성하였다.
2월 10일에 출발하여 2월 13일 강릉에 도착하는 일정이 날짜별로 표기되어 있다.

최근 업데이트 일시 : 2022/11/02 13: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