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城을 쌓는다는 것은 성 안에 둔 것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함이다. 감영의 설치로 중요성이 커진 도시를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대구에도 읍성이 조성된다. 경상감영 설치 후 130여 년간 이렇다 할 방어시설이 없었던 도시에 읍성이 축성되게 된 데에는 1728년(영조 4) 발생한 ‘이인좌의 난’이 결정적이었다. 역모 세력에 의해 청주성과 경상도 일부 지역 등을 점령당했던 경험은 조정에서 지방 거점지역 방어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동래읍성(1731년), 전주읍성(1733년), 대구읍성(1736년)이 차례로 축성된다.
대구읍성의 축성은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민응수閔應洙(1684-1750)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1730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동래읍성 축성을 이끌고, 이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전주읍성을 축성한 조현명趙顯命(1690-1752)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하던 때부터 그 필요성이 인식되고 있었다.
“무신란 중 대구부가 성곽이 없었던 까닭에
가산(산성)에 들어가 지키자는 쟁의가 있기까지 하였으나
관찰사가 듣지 않아 붕괴되는 근심을 면하였다고 하기에
읍성 축성에 대한 신臣의 의견이 틀림없다 여겨
(경상도 관찰사로 지내는 동안) 축성의
계책을 경영하였습니다.”
조현명, 『축성계문✽』계문 中
✽전주읍성 축성 기록
조선은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겪은 여러 차례의 전란을 통해 확인된 문제점을 보완하여 국가 방어를 위한 새로운 정책을 만들었다. 조총이라는 새로운 화기를 앞세운 일본과의 전투에서 이전 시기에 만들어진 낮은 읍성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자 산성 중심의 방어체제로 전환하였고, 전쟁 경험과 중국에서 들어온 다양한 병서들을 통해 병법과 축성에 대한 견문이 넓어지면서 산성중심의 방어체제는 도성인 한양의 수비를 강화하는 쪽으로 바뀐다. 그리고 도성에 대한 방어선을 강화하기 위해 한양으로 연결되는 주요 지역에 대한 읍성 개축과 증축을 시행한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대구읍성 축성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1736년(영조 12) 1월에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민응수閔應洙(1684∼1750)가 대구성大邱城을 쌓을 것을 청하였고, 이를 왕이 윤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구읍성에 대한 보다 상세한 사항은 읍성 완성을 기념하며 세운 <영영축성비>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대구읍성 축성은 1736년(영조 12)에 1월에 시작하여 완성까지 6개월 정도가 소요되었으며, 동원된 인원은 총 78,534명이었다. 축성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성을 쌓는 공간을 구획하여 각 구획별 우두머리[牌將]를 두었고, 재정 운영, 채석 등 각 분야를 감독할 사람도 별도로 지정하였다. 이렇게 쌓은 성의 둘레는 2.68㎞, 높이는 대략 3.5~3.8m이며 동서남북에 각각 ‘진동문鎭東門’, ‘달서문達西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 ‘공북문拱北門’의 큰 문 4개를 만들고 야간통행용 암문暗門인 ‘동소문東小門’과 ‘서소문西小門’을 두었다.
읍성은 축성 134년 만인 1870년(고종 7)에 경상도 관찰사 겸 대구도호부사 김세호金世鎬(1806-1884)가 다시 한 번 크게 중수한다. 이때 세운 비석인 <대구부수성비>에 따르면, 대구읍성 개축은 원래보다 높이와 크기를 키우고, 정해루定海樓, 주승루籌勝樓, 선은루宣恩樓, 망경루望京樓의 4개 누각을 새로 세웠으며 부서진 여첩女堞을 고치고 포대를 만드는 등 성을 더욱 견고하게 하였다. 작업은 1870년 봄에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끝마쳤으며, 7만전 정도의 비용이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감사와 대담을 끝내고 나는 많은 수행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고관이 타는 말에 올라 대구 시내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나에게 높은 성벽을 구경시키려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성벽을 따라 난 순시로는 베이징성의 축소판 같았다. 성벽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평행사변형이었다. 사방 성벽의 중앙에는 웅장한 성문이 있었다. 성문위의 누각 안에는 옛 역사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그림과 글귀들이 가득했다.(중략)내 발 아래로 이 도시의 길과 광장, 기념물들이 펼쳐졌다. 서민들이 사는 구역에는 초가지붕이 이마를 맞대고 있었으나 양반들이 사는 도시의 중심부에는 우아한 지붕의 집들이 있었다. 용마루에서 처마 끝까지 이어진 지붕의 기와들은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울려 절묘한 선의 조화를 이루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멋진지붕 양식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한문을 가르치는 큰 학교 향교였고, 다른 하나는 관아였다. 관아에 딸린 여러 건물 중에서 그 규모에서 가장 압도적인 것이 방금 내가 나온 객사인데, 단청이 돋보이는 그 건물의 지붕 꼭대기에는 관찰사의 커다란 붉은 깃발이 도시 전체를 굽어보며 나부끼고 있었다.
《Deux voyages en Corée》,
샤를 바라 & 샤이에 롱, KAILASH, 2000
우리가 들어선 (대구 성벽의) 남동쪽 모퉁이는 빽빽하게 건물이 들어찬 분주한 거리였다. 그리고 이 길을 통해 고을의 전체 남쪽 전면을 지나쳐서 서쪽 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비록 다른 곳처럼 진흙 따위로 지어졌지만 집들은 대체로 규모가 있었고 대개 사각형으로 견고해 보였다. 거리는 무척 넓었고 주막이 많았다. 성벽 모퉁이와 성벽을 따라 누각이 있었고 서쪽 대문은 약간 피라미드 모양으로 위풍당당했다. 하지만 서울이나 수원의 대문만큼은 아니었다. 성벽은 정말 깔끔하게 각을 세워 깎은 사각형 돌들을 쌓아올려 만들었다. 다른 곳처럼 총안이 뚫려 있었다.남동쪽 모퉁이에서 서문까지 가는 데 10분이 걸렸다. 거리는 사람과 가축 무리로 내내 붐볐다. 서문에는 훌륭한 아치형 돌다리가 있었다. 두 개의 아치가 있고 매우 평탄하며 대칭을 이뤘다. 여러 부분에서 조선에서 본 다리들 중 가장 최고였다. 개인지 호랑이인지 모를 머리 조각상이 아치의 중심 부분에서 길 높이로 돌출되어 있었다.
《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조지 클레이튼 포크, 조법종 외 옮김, 알파미디어,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