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대교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맡아 함께 생활하면서 부모를 대신해 교육을 맡는 것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전통적인 가정교육 방식입니다.
전통 대가족에서 손주 교육은 조부모에게 일임된 일이었습니다. 많은 자녀를 낳았던 전통사회에서는 여성들이 거듭된 임신과 출산으로 양육이 힘들어진 탓에 젖을 떼는 시기부터 자연스럽게 할머니가 손주를 보살피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습니다.
할머니는 손주들의 옷 입기, 식사예절, 말버릇까지 생활교육을 전반적으로 담당했습니다. 동시에 전래 놀이와 동요 등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할머니의 무릎위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라 해서 ‘무릎학교’로 부르기도 합니다.
남자아이의 경우 6~7세가 되면 사랑채로 건너가서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손님을 맞을 때는 반드시 불러들여 일상생활에서 어른을 응대하고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가르친 것입니다.

견문교육(見聞敎育)의 장(場), 사랑방

책가도(冊架圖)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늘 안동에서 보내온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을 보고 너희들이 합격했음을 알게 되었다. 요행임을 알면서도 너무나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중략).. 너는 벌써 『주역周易』을 읽고 있지만 『역학계몽易學啓蒙』도 읽지 않을 수 없으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곧장 내려와서 이들과 함께 『역학계몽易學啓蒙』을 읽는 것이 좋겠다.”
1560년경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70)이 손자 안도安道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입니다. 편지에는 ‘뜻을 세우고 인생을 설계할 것, 선비로서의 몸가짐을 바르게 할 것, 법과 원칙을 준수할 것, 사람으로서 도리를 지킬 것’ 등의 가르침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퇴계는 안도가 성년이 되는 나이인 15세 때 처음 편지를 보낸 이후로 16년간 줄곧 편지를 보냈습니다.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오늘날의 여느 조부모 못지않게 손주 교육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좌의정, 영의정을 지내고 오성부원군에 진봉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탁월한 외교 수단으로 전란을 무사히 극복한 후 그 공로가 인정되어 1599년 우의정을 거쳐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1602년에는 오성부원군에 진봉됩니다. 어렸을 때, 훗날 함께 재상이 된 이덕형(李德馨, 1561~1613)과의 돈독한 우정으로 오성과 한음의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조부와 손자의 각별한 관계는 문헌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손자를 위해 쓴 시詩를 들 수 있는데, 시詩에는 손자를 향한 조부의 애틋한 심정이 진솔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손자는 밤마다 글을 읽지 않네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약주가 과하시네
이 시는 채무일이 여섯 살 무렵에 지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할아버지 채수가 늦은 밤 잠자리에서 손자 채무일을 품에 안고 시를 한 구절 읊고는 손자에게 대구對句를 붙이게 한 것이지요.
개가 달려가니 매화꽃이 떨어지네
닭이 지나가니 댓잎이 생겨나네
이 시는 채수가 손자 채무일을 등에 업고 눈이 내린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주고받은 시입니다.
눈 쌓인 길을 달려가는 개가 매화꽃 모양의 발자국을 찍어둔 것을 보고 할아버지가 시를 읊자 손자는 닭이 대나무 잎 모양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는 내용의 시로 응대한 것입니다.
“응당 상세하고 천천히 타일러줘야 할 것이니,
조급하게 윽박지른다고 무슨 이득이 있으랴”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육아일기인 <양아록>의 한 구절입니다.
조선중기 선비 이문건이 쓴 <양아록>에는 격대교육의 특별한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