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들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다
1816년 한국 서해안을 탐사했던 영국 리라호 선장 바실 홀(Basil Hall 1788~1844)의 회고록으로 전해지는 이 말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문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1653년, 네덜란드 선박 스페르베르호가 제주도에 표류한다. 이때 표류한 사람 중 하나가 『하멜표류기』(1668)의 저자인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30~92)이다. 『하멜표류기』는 그의 억류 생활 14년간의 기록으로 그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을 유럽에 알린 최초의 문헌이다.
1882년 5월 22일. 인천 제물포 화도진에서 조선전권대표 신헌(申櫶, 1810~84), 미국 대표 슈펠트(Robert W. Shufeldt 1821~95) 간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은 조선이 미국과 교섭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진행되었지만 조선인 중에는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협상과정에서 미국과 조선 대표의 중간에 중국인 통역사 마젠중이 앉아 이중통역을 함으로써 교섭이 이루어지게 된다
미국과의 조약 체결 이후 서양과의 원활한 교섭을 위하여 영어의 필요성이 더욱 대두되면서 영어교육 기관으로 ‘동문학’이 설립된다. 뒤따라 육영공원,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 근대식 학교가 세워지면서 영어가 학교라는 제도를 통해 널리 확산되는 계기를 맞이하게된다.
이 시기의 영어교육은 주로 외국인 교관과 학생이 오직 영어로 모든 수업을 진행하는 ‘직접적 교수법’ 으로 이루어졌다
1880년대 선교사들이 설립한 사립학교가 등장하게 되면서 영어와 성경 중심의 교육이 이루어지게 된다. 선교사들은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다른 교과목이 추가되면서 영어에 대한 직접 교육이 이루어진다. 초기에 세워진 학교로는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이 있다.
1893년 4월. 미국 북장로회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목사가 대구를 처음으로 방문한다. 약 4일간 대구에 머물렀던 베어드 목사는 일기에 “대구에 도착하는 순간 책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몰려와 전도할 시간은 없었고 많은 책을 나누어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적어도 이 시기에는 대구지역에 영어가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본격적인 영어의 교육은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에서 시작된 것으로보기도 한다. 선교사가 설립한 대구의 초기 근대학교로는 해성재, 대남남자소학교, 신명여자소학교 등이 있다.
동문학과 육영공원 등에서 영어를 배운 학생들은 관리뿐 아니라 전신, 전기, 측량, 광산 등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직종의 통역으로도 활동하게 된다. 영어는 관리로 등용되거나 외국인과 거래해 돈을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