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이미 광복기에 「아동」(1945년 12월 창간)과 「새싹」(1946년 1월 창간)을 발간하였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이라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소년세계」와 「학원」을 창간하여 장래를 책임질 세대들에게 정신적인 풍요와 희망을 전해 주었다.
“죽지 않고 살아온 것만 다행으로 생각하며 여기 대구까지 피난해 온 어린이들, 그들이 거리에서 헤매지 않고 이곳에서도 선생님들을 맞이하여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은 불행 중에서도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우리는 서울서 온 이런 동무들이 보고 싶어 ‘서울피난 대구남부국민학교’를 찾아갔습니다. 대구서도 남쪽 끝 남산동 언덕 위에 누른빛 건물들이 보였습니다.
어른들이 하꼬방이라고들 하는, 판자로 지은 임시 건물 한 귀퉁이에 길다란 나무때기 학교 문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크기만 달랐지 꼭 길거리 하꼬방집 문짝같은 판자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그 안엔 선생님들이 책상들을 놓고 나무의자에 앉아 바쁘게들 성적도 끊으시고 글씨도 쓰시고 하십니다.”
“서울 시내 여러 학교에서 모여진 아동이 8백 50여 명, 이 임시 교사에서 책상도 교의도 없이, 방바닥에 비좁게 들어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서당처럼 방바닥에 주저앉아 배우지만 어린 마음에도 배워야겠다는 깨달음이 있고, 우리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한 시간이라도 헛되게 보내서는 안되겠다는 것을 모두가 가슴 깊이 생각한답니다. 어떤 교실은 판자집 방과 마루를 터서, 제법 깨끗하고 반반한 자리에서 공부하는 반도 있었습니다. 벽에 붙인 도화·습자, 바라보면 다 눈물겹습니다.
마루 밑에 놓인 고무신 운동화들, 천리 가까운 길을 걸어왔을 어리고 작은 발들이 신고 다니는 저 신발들...”
1952년 대구에서 어린이를 위한 「소년세계」와 「학원」잡지가 발행된 것은 한국인의 자랑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 「학원」지는 전쟁 중인 1952년 3~4만부가 판매된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전쟁의 잿더미위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급성장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운 전쟁기간에도 어린이 교육에 치중했고 국민들은 정신적으로는 빈곤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됩니다. (이경화 선생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