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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대구피난학교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1학년 3반 단체사진

6·25전쟁으로 중단된 교육을 재개하라!

“1951년 1·4후퇴 이후 많은 피난민이 대구로 몰려들었다. 대구는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학교시설을 군에 넘겨주어 교육시설이 부족하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피난학생들까지 수용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교실도 칠판도 없는 노천교육, 야외교육 등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육열이 높은 이 지방 사람들은 이러한 전쟁 속에서도 결코 잠시도 교육을 중단하지 않았다. 산에서, 들에서 혹은 천막 속에서 혹은 천막도 없는 뙤약볕 아래서 가르치고 배우고 했다.”
- 「대구시사」 중에서-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의 개설

"1951년 봄부터 부산시내에서 피난학교들이 속속 개설되었다는 소식에 자극을 받은 대구시내에 피난하고 있던 서울시교육관계자들이, 서울시연락사무소(달성군청내)에 모여 연구 협의한 끝에 경상북도 당국의 협조를 얻어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를 개설 운영하게 되었다."
- 「문교부 열록(1952)」 중에서-

전쟁 중 중학교육은 달라야 한다.

[1950년대의 대구 중등교육 방침]

  • 피난 학생의 취학을 독려해야 한다.
  • 가교실, 피난 특설학교를 설치해야 한다.
  • 북한 피난 학생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
  • 도시 피난 학교를 설치하여야 한다.
  • 전시 연합 대학을 설치하여야 한다.
  • 생벽돌로 교사를 신축해야 한다.
  • CAC 원조(미8군 건축자재 공급)로 임시교사 1,000개 교실을 건축할 것이다.
  • 전시 교재의 발행 및 교과서 발간과 배부에 대한 조치를 세워야 한다.

우리학교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 - 우리 학교 -

    중2. 마종기

    우리 학교는 피난 학교다.
    다 쓰러져 가는 「하꼬방」집이다.
    겨울엔 창문으로 무섭고 찬 바람이 불었다.

    그렇다 그렇다
    배움에 끓는 학도들은
    연상 손을 호-호 불어가며 공부를 했다.
    앞날의 희망을 보고....
    쓰라린 고통도 잊은 것이다.

    여름엔 더욱이나 노곤한 몸에 더위가 닦친다.
    흙덩이 천막,
    몬지속에서 공부를 한다.
    내일을 위한 힘을 쌓고 있는 것이다.

  •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재현

서울피난 대구연합중고등학교 교가

작사: 시인 조지훈(1920∼1968)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로 불리는 시인이자 국문학자로 전쟁 당시 공군종군문인단 부단장으로 대구에 머물며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교가를 작사하였다.

  • 서울피난대구연합중고등학교 교가-하모니카버전
  • 서울피난대구연합중고등학교 교가-중창버전

피난학교 교가 발굴을 위한 아름다운 협업 ... “친구야~ 아직도 기억나냐?”

이 교가는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살고 있는 시인 마종기 선생의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가물거리는 기억 끝에 마침, LA에 살고 있는 피난학교 친구 김동근 선생(캘리포니아 주정부 공무원 퇴임)이 멜로디를 기억하고 있었다. “야, 것두 몰라? 이 친구 참!” 두 친구가 기억해 낸 노래를 미국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살고 있는 피난학교 동창생, 공학박사 이경화 선생이 반가운 마음에 하모니카로 연주! 완벽한 교가가 되살아났다.

  •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교가 가사
  •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교가 악보

서울피난 대구연합중고등학교 교훈

화합, 성실, 활달, 강의(和合, 誠實, 闊達, 剛毅)

그때 우리는...그 시절, 피난학교 재학생을 만나다

  • 나의 글은 배고픔을 잊기 위한 산물이었다.

    전쟁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고통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이었지만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큼은 정말 괴롭고 싫었다.
    피난 올 때 각자 쓰고 온 모자들, 피난 온 선생님과 피난 온 학생들이 모여 하꼬방 같은 판자촌 학교에서 다들 열심히 가르치고 배웠다.

    책보에 둘둘 말은 신문 20장을 들고 ‘내일 아침 영남일보’를 외치며 대구역 앞을 서성였고, 다 팔면 동생에게 쫓아가 같이 팔아주었다.
    가난, 배고픔이 키운 문학열! 긴긴 여름 해, 배고픔을 잊기 위해 책 읽고 글 쓰는 걸로 시간을 때웠던 나는 그때부터 각종 신문사, 잡지 등에 글을 보냈다.

  • 마종기

    의사이자 시인으로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아들이자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등 현재까지 문학활동을 펼치고 있다.

  • 현미

    1960, 70년대를 풍미했던 대표 여자가수로 현재까지도 활발한 가수활동을 하고 있으며, <밤안개>, <보고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 없이> 등 수많은 히트곡이 있다.

  • “안녕하세요? 피난민입니다. 간장 좀 얻으러 왔습니다.”

    대동강, 임진강을 건너면서 동태가 되었고 입은 옷 그대로 몇날 며칠을 걸어왔던 우리는 밤이면 입었던 옷을 벗어 이를 툭툭 떨어내고 또다시 그 옷을 입어야 했다.

    12명이 한 방에 살았던 산꼭대기 초가집..
    장사나간 엄마 대신 동생을 돌보고 집안일도 하고...학교를 갈 때면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어린 동생들을 상다리에 묶어놓고 나와야 했다.

    오직 밥 세끼 먹는 게 소원! 13살의 나는 염매시장에서 떡장사를 해야 했고 쌀, 옷, 분유 등 구제품 없이는 못살았던 우린 간장마저 얻어먹어야 하는 피난민이었다.
    12명이 살던 그 좁은 방에서도 형제들끼리 누워 ‘베사메무쵸’를 따라 불렀던 시절, 극장에 몰래 들어가서 공연도 보고 꽃초롱 극단에 들어가 무대서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 그 전쟁통에 유일하게 생기가 도는 곳, 바로 학교였다.

    죽음을 뚫고 내려온 피난 길. 우물에서 물 마시다 폭격맞은 사람을 보았고 엄마의 주검 옆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모른 척 지나쳐야 했다.
    피난민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던 유일한 곳.
    야전천막만한 판잣집이 교실별로 여러 채, 천장만 있지 옆은 뻥 뚫린 곳에서 칠판 하나 걸어놓고 책상도 없이 긴 판자떼기에 앉아 공부하던 학교!

    아홉 끼를 굶어 쓰러진 나를 업고 뛰는 친구에게 우리집 대신 친구 집에 가자고 했다.
    매일 굶는 우리집과 달리 세끼는 먹고 사는 형편이라 한 끼 얻어먹었다.
    자존심 때문에 굶었다는 말은 못하고....

    선생님도 가난하고 학생도 가난하고...없는 살림에 배고픈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신 선생님. 당황하시면서도 얼마없는 식구들 밥까지 내어주신 사모님. 모두가 가난해도 정만큼은 넘쳤던 시절이었다.

  • 채현국

    현재 양상 효암학원 이사장이자 문화운동가로,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민주운동을 하는 많은 지인들에게 도움을 주어 ’풍운아’라 불린다. <쓴맛이 사는 맛> 등의 저서가 있다.

  • 이경화
  • 삶은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았다.

    전쟁은 어렵다. 아프다. 가난을 떠안기며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고 피난길에 두 동생을 잃은 내 어머니는 평생을 가슴속에 돌덩이 하나 얹고 살아야 했다.

    무서운 전쟁 속에 만난 피난학교는 희망이었다.
    판잣집이긴 하지만 피난학생들이 속속 몰려들었고 그때의 배움으로 서울의 고등학교 진학을 가능케 한 배움의 돌다리 같았던 학교!

    무성영화의 연사처럼 실감난 연기와 함께 세계명작문학을 소개해 주셨던 선생님, 먼지구덩이 속, 꼬질꼬질한 모습이었어도 명작을 들을 때만큼은 세계를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신기하게도 피난학교에 피아노가 있었다. 명곡을 연주하는 학생에게 자극을 받아 시장통에서 값싸게 구입한 하모니카는 생활 속에서 늘 함께하고 있다.

[안병영]

제36대 교육부 장관, 제4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활동 중이다.

[한동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졸업 후 동진기업, 현대 종합상사 등의 기업에 근무하였으며,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출간하였다.

[구본안]

초등학교, 고등학교에서 35년간 근무하였으며, 자전적 에세이 <삶을 뒤돌아보며>를 출간하였다.

전시 교육, 무엇을 배우고 가르쳤나?

제대로 된 살림살이 하나 챙겨오지 못한 피난길, 변변한 책 하나 없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무엇을 가지고 공부했을까?

어려울수록 힘을 모으다

어려울수록 서로 돕는 우리 민족의 따뜻한 마음은 6・25의 폭격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물자가 귀한 시절에도 어린 학생들은 서로 정(情)을 나누었다.

  • 학용품을 보냈더니 오징어가 왔어요~

    대설 피해를 입은 울릉도 학생들을 위해 대구의 학생들은 구호물자와 학용품을 보냈다.
    그 답례로 울릉도에서는 오징어를 보내와 훈훈한 정을 느끼게 하였다.(1953년 5월 26일 신문기사)

    통일(統一)이 될 때까지 사치품을 쓰지 말자!

    대구일중학교 학생들은 통일이 될 때까지 시계, 자전거 등 사치품을 쓰지 않겠다는 결의를 하였다. (1953년 6월 30일 신문기사)

아직도 선생님 앞에만 서면 피난지 노천교실 소년입니다.

-‘스승의 날을 앞두고 구순의 은사께 쓴 편지’ 중에서- (전 부총리 안병영)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피난지 대구에서였습니다. 피난 온 헐벗은 학생들을 모아 화장터 옆 산언덕에서 큰 나무에 칠판을 걸고 하는 수업.
선생님은 전쟁 저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게 될 새로운 세상과 그곳에서 해야 할 일들을 근엄하게 일깨워 주셨고 희망의 씨앗을 가슴 속에 심어 주셨습니다.

그 해 가을이 깊어지면서 당장 추위를 막아 줄 판잣집 교실이나마 마련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선생님은 가정방문을 나섰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돈>이야기를 차마 입 밖에 내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서실 때는 머리를 깊게 숙이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제가 “선생님! 이러시면 어떻게 해요? 그 말씀을 하셔야죠.”라고 당돌하게 여쭈었더니, 선생님은 먼 하늘을 쳐다보시면서, “그래 다음 집에서는 꼭 하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음 집에서도 선생님은 그 말씀을 꺼내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그때 그 모습이 그렇게 인상 깊고, 존경스러워 아직도 오랜 감동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교육정보 2004. 5. 12)

피난학교 선생님 이야기

선생님 아니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습니다.

1951년 9월 20일. 서울피난 대구연합중학교 개교 이래 정말 훌륭하신 선생님들이 수업 및 운영에 힘써 주셨다.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함께 고생하고 이끌어 주신 모든 선생님을 다 기억하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이경희 선생님(1916~2004)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 대구로 피난, 서울피난 대구연합중고등학교, 남산여고,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카톨릭대학교 전신)에서 후학을 양성하셨습니다.
‘피난’으로 대구와 인연을 맺어 대구와 영남지역 피아노계 발전에 앞장서 오셨습니다.

이덕진 선생님(1923~1978)

고등학교 교사이자 시인으로서 6·25 후 종군작가단에 참가하였으며, 대구로 피난오신 후 서울피난 대구연합중고등학교에 계셨습니다.
휴전 이후 효성여자고등학교와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연합신문사, 경향신문사 등 언론사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전시실 사진

ZONE 02

피난학교 이경희 선생님

피난학교 이덕진 선생님

피난학교 제2회 졸업식 앨범

피난학교 제2회 졸업식 앨범

피난학교 제2회 졸업식 앨범

피난학교 제2회 졸업식 앨범

최근 업데이트 일시 : 2022/11/02 11:17:11